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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y 17. 2020

Paralegal, 기업지배구조

최근- 그러니까 4월 1일을 기점으로 부서를 이동했다. 법무지원부. 부서에 열한 명이 있는데 나와 다른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변호사님들이다. 나의 공식 직함은 paralegal. 미드 슈츠<Suits> 에 나오는 레이첼 (a.k.a. 메건 마클 왕자비) 같은 paralegal을 기대하고 싶겠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학부 전공도 법과는 거리가 멀고, 석사학위도 경영학인 법.알.못. 나에게 어째서 이런 일이 주어졌는지... 는 이전 부서에서의 경력 때문이리라.


입사해서 지금까지 제법 오랜 기간을 증권수탁업무부라는 곳에 있었다. 영어로는 Custody 라고 하는 업무. 나름 외국계 금융사에서 specialty를 가지기에 괜찮은 업무였고, 이직도 괜찮았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쪽으로 진출하기도 괜찮았다. 여기에 있다가 관련 자격증 등을 따고, Trustee 업무를 한 번 더 거치면 이 분야에서는 제법 전문가가 되겠다 싶었다. 문제는 하도 오래 하니 지겨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 분야의 경력 단절은 아까웠지만 다른 분야로 이동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간 곳이 경영혁신부. 다른 회사에는 보통 전략기획실, 기획조정부 등의 이름으로 있을 것이다. 흔히 이런 부서를 권력의 핵심이며 조직의 주요 의사결정에 키를 쥐고 있다... 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반쯤은 비서실의 업무도 수행하기 때문에 CEO를 비롯한 임원들의 동향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곳은 의사결정을 내린다기보다는 결정된 사안이 신속하게 조직 전체로 전달되고, 차질 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돕는다. CEO 주재의 각종 이벤트를 담당하다 보니 일부 confidential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직 내/외부에 도는 소문이나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업무의 일부다.


그러나 조직의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구는 이사회다. 각 사업본부에서 안건을 제출하거나 보고하고, 이사회와 그 부속위원회에서 핵심적인 결정을 내리면 그때서야 비로소 무언가를 추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필요한 능력은 기본적으로 조직 생활에 요구되는 근면함, 세심함, 차분함, 영어와 문서 능력 등을 기본적으로 포함하여 confidentiality 와 loyalty 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직에는 어디나 소문을 전파하는 근원이 되는 이른바 빅마우스(big mouth)가 있기 마련이고, 일단 정보를 입수하면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침묵파가 있기 마련이다. 다른 능력은 모르지만 침묵과 신묵, 충성심 같은 것은 내가 나름 자신할 수 있는 요건이기는 하다.


Paralegal 이라고는 하나 실제 나의 업무는 기업지배구조와 IR에 대한 부분이다. 아마도 임원회의나 각종 행사 등을 주관하거나 보조하며 듣게 되었던 각종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한 것을 상부에서 아셨으려나. 나로서는 알 수 없은 노릇이다. 이미 조직의 큰 구조와 운영에 대한 이해가 있다는 부분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부서에 올 때에도 법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 우려했는데, 업무를 할 때 큰 차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구조법과 상법을 알면 확실히 좋다. 뒤늦게 법조문을 찾아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권장하고 있지만 처음 일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답답함이 많아 자진해서 계속 사무실 근무를 했다. 소개팅에서도 첫인상이 중요한 것처럼, 경험상 부서에 전입된 사람도 초반에 어떻게 각인되는지 여부가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 같다. 근면성실하고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일을 해내려고 노력하면 어디에서든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아무리 꼼꼼히 챙긴다고 해도 실수나 수정사항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빨리 하기라도 해야 상사나 다른 누군가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모를 때는 부끄러움 따위는 던져버리고 여기저기 질문을 해 대는 수 밖에 없다. 하고 나서 퇴짜를 맞느니 하기 전에 최대한 질문하고 확인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요즘 퇴근은 늦어지고 몸은 지치지만 새로운 일을 하게 되니 조금 신나고 재미있기도 하다. 그런데 법 공부는 언제 어떻게 해야 할 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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