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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Feb 26. 2018

먼 훗날 한 말씀 하시도록

신이 내 편이 아니라 해도, 나는 신을 탄복시키겠다.


내 불행을 은폐, 혹은 축소하려 남의 불행을 빌리거나, 내 행복을 위해 남의 지갑을 빌리는 일은 비겁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더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을 보며 나의 현재가 비교우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일.


생이 유독 무겁게 다가오던 날이었다. 그다지 절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그 친구에게 넋두리를 풀어놓은 것은 그가 겪어온 삶의 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래에서 흔히 겪을 일 없는 굴곡진 사연의 연속이었던 날들을. 다행히 현재는 그 모든 풍파를 극복하고 행복하고 안정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기에.

그녀는 담담히 어깨를 내 주었고 나는 그녀의 불행에 기대어 위로받았다. 안다. 비겁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대가로 치러서라도 평안을 얻고 싶었다.


"한 가지 사건을 백 명이 바라보면,

백 개의 시선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대.

그래서 그 일은 백 개의 서로 다른 사건으로 재탄생하는 거야.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것은 이런 일이라고, 일일이 쫓아다니며 설명할 수는 없어.
나는... 가장 친한 친구의 고발로 검찰 조사를 받은 적도 있고, 믿었던 거래처 사장님의 영수증 조작으로 빚쟁이에게 쫓기기도 했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 정말 소문일 뿐인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둔갑해서 외톨이가 되기도 했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공황상태에 빠져 몇 달 동안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울기만 한 적도 있어.
그래도 나는 그냥 내 삶을 살았어.
나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힘든 일을 겪기도 했어.
아마도 어쩌면, 더 힘든 일을 겪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누가 진정 내 편인지도 알게 됐어.
더 행복한 날도 분명히 올 거야.
내가 바라는 건... 하느님이 진정 계시다면, 언젠가 하늘에 갔을 때 '내가 너를 이 세상에 보내길 잘 했구나' 하고 한말씀 하실 수 있도록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



친구는 소위 칭하는 '좋은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어떤 학자나 성직자보다 더 현자였다. 그녀와 나의 차이는 그녀는 그 일을 허락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그 일이 나에게 발생한(happened) 것과 내가 그 일을 허락한(allowed)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무저항적이고 무비평적으로, 수동적으로 삶에 떠밀리는 것에서,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서 그 일과 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등 뒤에서 떠들고 비웃고 고소해하고 음해하도록 허락했지만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복수심이나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남의 사생활을 캐내며 이야기해야만 자신의 삶에 만족감을 얻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것이다.


지식과 지혜가 꼭 비례하지는 않음을, 연륜이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련이란 이겨낼 가치가 있는 경험임을, 나와 같은 해를 살아온 친구의 입에서 확인했다.


그림: 모세와 타는 덤불(Moses and the Burning Bush), 1642-1645 by 세바스티앵 부르동(Sebastien Bourdon) 1616-1671, 프랑스


신은 과연 공정한가?

잘 모르겠다.

신은 과연 자비로운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때로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서 더 큰 분노와 혼란에 빠질 때도 있다. 착한 사람들이 고통받는가 하면,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기도 한다. 설명되지 않는 모순과 납득할 수 없는 불의가 판칠 때는 신에 대한 회의를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절대자가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보아주고 있을 거라는 믿음, 내가 세상에 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대상이 있다는 믿음은 잔뜩 뜯겨지고 찢겨진 채로 넘어져 있던 내가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걷게 만든 힘이었다. 아무도 없는 순간에도 그 따사로움이 솜이불처럼 조용히 시린 어깨와 등을 감싸안아 주는 것 같아, 스산한 길을 혼자 용기내어 걸어갈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신의 귀에 내 기도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이 나를 돕지 않는다 해도 신을 등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신을 탄복시키리라. 내가 너를 세상에 보내기를 잘 했구나, 잘 살았구나. 한말씀 하시도록. 그 한 마디를 위해 오늘도 어떤 일이든 허락하리라.


죽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었던 순간에도, 잡고 싶을 만큼 행복했던 순간에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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