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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r 01. 2018

부상자들의 세상

"여기 보이시죠? 뼈가 부러졌네요. 인대가 파열되면서 뼈가 함께 부러진 겁니다."


출근길에 발을 삐끗했을 뿐인데 진단은 뜻밖에도 심각했다. 발목 골절과 인대 파열. 어지간한 통증은 잘 참는 편인데 발목이 퉁퉁 붓고 점점 아파와 병원에 간 것이었다. 물리치료 정도를 받으면 나을 줄 알았다. 그러나 7주 동안 석고붕대, 즉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 망연자실했다. “전 깁스는 처음인데요” 라며 당황한 내게 의사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든 다 처음이 있는 법이죠.”


이 귀찮은 석고붕대로 인해 제약을 받는 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단연 힘든 것은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기능할 수 없는 한쪽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아주 느리게, 뒤뚱뒤뚱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광화문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야 했다. 계단을 오르기가 귀찮아 늘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곤 했다. 그러나 이 상태로 횡단보도를 건너기에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너무 짧았다. 하는 수 없이 불편한 발을 이끌고 지하도로 향했다.


지하철 광화문역 개찰구 앞에는 몇 년째 인권 투쟁 중인 장애인들이 있었다. 아마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의 사진과 간이 분향소도 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들. 그릇된 일은 아니지만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한 일들. 무심한 눈길을 던진 채 서명하지 않고 그 현장을 지나치곤 했다. ​


이전처럼 빠르게 걷지 못해 느릿느릿 쉬엄쉬엄 걸으며 장애인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을 본다. 휠체어에 앉아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그들에게 갑자기 미안함이 앞선다. 나의 장애는 일시적인 것이다. 7주, 예고된 기간이 지나면 아마도 깁스를 풀 것이다. 사고가 나기 전과 똑같아지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이내 정상적인 보행을 회복할 것이다. 몸도 생활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체 부자유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탓도 아니고 그들의 선택이 아닌 일들. 책임만이 그들의 몫이었다.


아주 예전에 본 신문 기사가 생각났다. 미국의 상이용사 보브 위랜드.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두 팔과 엉덩이만으로 3년 8개월 6일에 걸쳐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 거대한 미국 대륙을 횡단한 그에게 경탄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발은 여분이다"


그는 발이 여분이라 했지만 내게 두 발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그것을 박탈당한 후에 깨닫는다.



7주 후.

깁스를 풀고 다시 그 자리를 지났다. 왠지 나는 서명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7주 동안 붕대에 갇혀 있던 내 발을 바라본다. 적지 않은 체중을 싣고 다니느라 힘겨웠을 텐데도 잘 버텨주어 고맙다. 결핍과 상실의 고통을 거치지 않았다면 깨달을 수 없었을 충만함과 온전함의 축복. ​

여분이 넘치는 신체와, 반대로 부족분이 너무 많은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산다. 무사한 하루에 감사하고 무탈을 장담할 수 없는 앞날이 두려운 이유이다.


석고붕대에 몸과 마음이 갇힌 7주 동안 사회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친 것은 다리인데 어째 눈도 귀도 함께 어두워졌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종로의 한 여관에서 화재가 났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성난 취객이 홧김에 불을 지른 것이라 했다. 아직 열 한 살, 열 세 살에 불과한 자매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 구경을 왔다가 세 모녀가 모두 변을 당했다. 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친아버지와 계모에 의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이의 '보호'자가 되었어야 할 아버지에게 아버지라는 명칭은 너무 과분하게 보였다.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죄 없는 생명들은 자꾸만 희생되었다. 피해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고를 목도했거나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상처를 입었다.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부상당한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일가족을 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일하던 편의점 직원을 폭행하여 중상을 입히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온전치 않았다.


신체의 부자유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신의 미약함인데 그것은 대개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보이는 위험보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더 크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필요한 관찰과 조치를 놓치고, 그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늦은 뒤다. 소를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소를 잃고 밭을 잃고 초가삼간이 불타도 외양간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내 외양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신체가 다름으로 인해 타인에게 끼치는 해악은 극히 미미하다. 오히려 어떤 위해를 가하기보다는 사소한 행동 하나를 하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오히려 좀 더 많은 신체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위험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신의 기능이 결여된 사람들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위험을 내재했다.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이들로 인해 발생하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고 또 다시 사회로 방출되곤 하였다. 본인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와 주의 의무를 게을리 한 데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 모두의 책임을 묻기에는 정신이 손상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무단 방류된 독극물이 통제 불가의 돌연변이를 만들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에서처럼, 당장 보이지 않고 피해는 내 몫이 아닐 거라 생각해 방치한 많은 위험 요인들은 곳곳에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괴물'이란 비단 영화에만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척에서 실재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은유가 아니겠는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사실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이들도 얼핏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탄생에는 우리 모두 일정 부분 가담한 바가 있다. ‘외면’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두려운 것은, 그 괴물이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잃어 봐야 잊지 않고 잊지 않아야 잃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매번 그래서는 잃을 것조차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잃지 않고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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