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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r 03. 2018

바보동화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달모지재(愚達謀智才)' 라는 말이 있다.

재주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만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꾀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하며, 꾀 많은 사람은 통달한 자를 넘지 못하고, 통달한 자는 어리석은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스마트폰, 스마트 워킹, 스마트키... ‘스마트’ 해지기를 권유하는 세상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소외되는 것 같고, 새로운 어플을 받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스마트함을 향해 달려갈수록 마음 한편에서 ‘바보같음’에 대한 향수는 더 간절해지는가 보다.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과 ‘바보야’라는 글씨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고인의 뜻을 이어나가기 위해 ‘바보의 나눔’ 재단이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바보처럼 살라”는 현인들의 메시지는 처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하셨고, 부처님은 바보처럼 살라 이르셨으며, 공자님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가르쳤다. 세계를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들이 모두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재사(才士)가 되기보다는 필부필부(匹夫匹婦)보다도 덜해 보이는 우둔함과 우직함을 설파했던 것이다.



"결국 녀석은 밭을 거의 다 갈아버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뭐야. 그러니 친구들! 나를 좀 도와줘. … 그 바보녀석이 농사를 계속 짓는 한 그 형제 녀석들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될 테니까. 결국 그 바보가 두 형들을 도와줄 테니까 말이야"
– 톨스토이, <바보이반> 중


톨스토이의 소설 <바보이반>에서 주인공 이반은 각각 군인, 상인인 두 형을 제치고 왕이 된다. 그런데 그 과정은 아이러니하다. 야심에 가득찬 형들은 형제들을 몰락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에 금방 넘어간다. 반면 우직하게 자기 일을 하는 '바보' 이반에게는 그런 술수나 계략이 전혀 듣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현혹될 수 있는 것들을 악마는 끊임 없이 제시한다. 돈, 권력, 명예. 부귀영화를 거저 얻을 수 있는 달콤함. 그러나 이반은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천진하게 역으로 일손을 청한다. 순진함을 넘어 다소 모자란 듯한 이반에게 악마는 경계심을 가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어느새 악마는 본분(?)을 잊고 노동에 종사한다. 물론 이반은 강요한 바 없다.


주위에도 간혹 ‘바보’들이 있다. 마음의 빗장을 풀게 만들고, 어쩐지 도와주고 싶은 사람들. 자기 일을 해내기에도 버겁게 보이지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선뜻 손을 내어주는 사람들. 어차피 뒤쳐져 있을 것만 같아 측은해 하며 방심하고 있는 사이 이들은 홀연히 앞서 있다. 때로 그 느린 걸음으로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을 이뤄내기도 한다. 영화 <쿵푸팬더>에서 현인의 선택을 받아 최고의 실력자인 ‘쿵푸 마스터’가 된 것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전사 타이렁이 아니라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팬더 포였던 것처럼.



만두를 좋아하는 것은 나도 비슷한데 어째서...



“이 나라에는 모두 손으로만 일을 해야 한다는 바보 같은 법이 있군요. 그런 생각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영리한 사람은 무엇으로 일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같은 바보가 어찌 알겠는가? 우리들은 대부분 손과 등으로 일을 하지.”
“그렇게 일하는 것은 여러분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으로 일하는지 알려주지요. 여러분들도 깨닫게 될 겁니다. 손보다 머리로 일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라는 것을.”
–톨스토이, <바보이반> 중


그러나 우리는 모두 머리로 일하는 사람보다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란다.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이 말해주듯 '똑똑한' 악마는 '바보' 이반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지닌 사람의 성공이 아니라, 맨땅에서 시작해 일궈내는 사람들의 역전을 갈구한다. 이제 제법 해가 흐르기는 했으나 ‘슈퍼스타K-2’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결승에 오른 두 사람은 극명히 대조되는 프로필을 갖고 있었다. 해외 명문대학 출신의 곱상한 청년 존박과 이웃집 아저씨같은 외모의 전직 환풍기 수리공 허각. 사람들은 조심스레 존박의 승리를 점쳤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우승자가 된 것은 후자였다.


애플 사의 스티븐 잡스 회장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 가정에 입양되었다. 빌게이츠는 미국 시애틀에서 로펌을 운영하는 변호사 아버지 슬하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자주 비교되는 이들이지만, 사람들은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 그리고 그 창업자인 스티븐 잡스를 현대의 신화로 기억한다. 그의 유명한 명연설인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 축사에서 그는 외쳤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스마트폰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이폰의 창시자가 이런 말을 했다니 어쩐지 모순인 것 같다. 남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거나 조금 더 성공하려 전략을 부리는 사람이 아닌, 초심에 머물러 어리석은 듯 노력하는 사람이 최후에 웃는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많은 바보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주춧돌이 된다.


3월에 입학하는 학제에 적응된 탓인지 3월에 태어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월보다 3월이 더 한 해의 시작처럼 느껴진다. 새싹이 돋고 해가 길어지며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니 출발점으로는 이 무렵이 더욱 적절한 것 같다. 시간의 분절이야 내가 나누기 나름 아니겠는가.


한 해를 시작할 때면 올해의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해지고, 한 해가 저물어갈 때면 결실이 없다는 생각에 조급해진다. 가시적인 성과를 낸다거나, 내세울 만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의무감의 근원은 무엇인지. 열심히 살았던 하루하루에 대한 소중함은 잊고 내세울 만한 업적을 찾기에 급급하다. 더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리라.

올해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넉넉한 시각으로 시간을 품고 묵묵히 가는 ‘바보’가 되어 보아야겠다. 스마트함이 넘치는 세상에서 나 하나쯤 미욱해진다 한들 크게 문제될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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