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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r 13. 2018

냉장고를 부탁해

모두가 풍성한 냉장고를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TV 없이 산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TV 없이 살 수 있을까, 처음에는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다. 디지털 디톡스를 하려는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TV의 역기능에 얽매여 괜한 걱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귀찮았을 뿐이다...
어차피 TV가 있다 해도 그 무궁무진한 채널을 가진 매체에서 나의 선택지는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드라마 한두 개와 뉴스, 그리고 가끔 보는 교양 프로그램. 대체로 오락 프로그램에 채널이 머물러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웃음을 주기 위해 만든 그 프로그램들이 내게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헬스장이라는 곳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30년 넘게 담을 쌓고 지냈던 오락 프로그램의 재미에 뒤늦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런 문명의 혜택과 제작진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기계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이 운동은 고문과도 다름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얼굴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가수들이 연이어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 시답잖은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 연예인의 일대기를 파헤치는 프로그램까지, 이전까지는 당최 내가 왜 이런 것을 시청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프로그램도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에서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몰입하게 된다. TV와 러닝머신의 결합이라는 뛰어난 생각을 최초로 해 낸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심지어 TV가 보고 싶어서 헬스장에 가는 적도 있다. 주객이 전도되어 운동은 건성으로 하고 TV를 보며 킥킥대곤 한다. 가끔 옆 기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체력단련에 열을 올리는 건실한 '회원님'들은 거북이 걸음으로 모니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흘끔대기도 한다. 우등생이 열등생을 쳐다보는 눈빛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는다. 난 TV가 없으니까.

참고로 이 프로그램과 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은 JTBC 의 ‘냉장고를 부탁해’ 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포맷은 충분히 유추 가능한 것인데다 요리를 자주 하는 편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채널을 고정하기 망설여졌다. 그래도 표면상으로는 운동을 하겠다고 와서는 '먹방'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에 다소나마 죄책감도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이내 프로그램에 몰입되었다. 명불허전의 입담을 가진 진행자들의 사회가 지루할 틈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유명 요리사들의 화려한 요리 실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흡입력을 주는 요인은 매번 바뀌는 냉장고 주인의 냉장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늘 나오는 패널의 냉장고에는 어떤 재료가 들어 있을까. 살림을 해 보면 남의 집 살림을 들여다 보는 것만큼 재미난 것도 없다. 실례될까 남의 집에서 쉬이 열어보기 어려운 냉장고 구경이야말로 가장 재미나고 귀한 구경이었다.


어떤 연예인의 냉장고는 세계 3대 진미라는 캐비어, 트러플, 푸아그라가 다 갖춰져 입을 떡 벌리게 만들기도 한다. 요리업계 종사자의 냉장고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놀라울 정도로 산해진미가 가득 찬 냉장고가 있는가 하면, 냉장고가 아니라 회사의 캐비닛을 보는 것처럼 종류별, 유통기한별로 식재료를 배열해 놓은 냉장고도 있다. 그런가 하면 냉장고의 저장 기능에 대해 회의가 들 정도로 텅 비어있거나, ‘냉장’이라는 능력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인스턴트 음식이나 상한 음식으로만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로는 양 극단의 모습보다는 친근한 식재료가 나오는 경우가 제법 흔했다. 가령 어머니가 담가주신 김치라던가, 익숙한 상표의 쌈장 같은 것을 볼 때, 손질되지 않은 야채와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처치곤란의 각종 재료들을 볼 때, TV에 나오는 그들도 결국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는 친밀함과 동질감이 고조되면서 몰입도가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돈 워리, 비 해피 이기를.


모두가 진귀하고 값진 재료로 가득 찬 풍성한 냉장고를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난감할 정도로 텅 빈 냉장고를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또 냉장고의 재료가 아무리 탐난다고 해서 모든 재료를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빈약한 냉장고라고 해서 쓸만한 재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대니 그레고리는 10개월 된 아들 잭, 스타일리스트인 아내 패티와 함께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가 지하철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한다. 절절했을 비극의 날들. 그러나 그는 저서 <모든 날이 소중하다> 에서 ‘우리는 삶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줄 지를 정할 수 없으며 단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 만을 결정할 수 있다’ 고 말한다.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며 느끼는 조마조마함과 감탄의 근원은 여기에 있었다. 우리도 냉장고를 선택할 수는 없으며 어떤 냉장고가 주어지든 최선을 다 해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짧은 15분이라는 시간 안에 빚어내는 창조물들을 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만한 작품들이 많다. 요리하는 분들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나온다. 요리에 임하는 자세나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허세 가득한 퍼포먼스로 즐거움을 선사하는 쉐프가 있는가 하면, 웃음기 없이 바짝 긴장한 채로 15분을 종종걸음치는 쉐프도 있다. 연신 장갑을 갈아 끼우며 요리를 하는 쉐프도 있고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지 않았어도 훌륭하게 음식을 해 내는 쉐프도 있다. 심지어는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상상력으로 미각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시켜 요리를 해 내는 대가도 있다. 각자 스타일은 다르지만 요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최선을 다 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냉장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재료들이고, 요리는 우리의 삶과도 같다.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재료로 가득 찬 냉장고. 복불복 게임과도 같은 그 냉장고의 문을 여는 순간 게임은 시작되고, 우리는 언젠가 종이 울리기까지 최선을 다 해 삶을 완성해 나갈 뿐이다. 삶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다.

"냉장고를 부탁해."
나는 어째 인생도 냉장고도 거대한 혼합물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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