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 방법
집에서의 R&R은 (엄마에게) 기울어진 운동장
“출근하니 살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워킹맘들이 이렇게 말한다. 왜일까? 첫째는 사무직의 경우 육아나 가사에 비해 신체적 노동 강도가 확연히 낮기 때문이고, 둘째로 집에서와는 달리 회사에서는 R&R 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출산 전에는 한 번도 부부싸움이란 것을 한 적이 없다는 부부들도 아이를 낳고 나면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유는 하나다. 그만큼 몸이 힘들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잠도 부족하고, 잘 챙겨먹지도 못하고, 피로가 누적되고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아기는 운다. 이번엔 네 차례야! 라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아주 모범적으로 아기돌봄과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한 누군가는 더 억울한 상황이 생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것은 엄마다. 특히 나처럼 모유수유를 10개월까지 했던 경우에는 아기가 새벽에 울면 젖을 물려야 하므로 아기 케어는 100% 엄마의 몫이 된다.
꼭 모유수유를 하지 않더라도 6-7개월쯤 되어 아기가 낯을 가리고 엄마의 존재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소위 말하는 ‘엄마 껌딱지’ 시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부터 엄마에게는 사생활도, 인권도 없어진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 앞에서 대성통곡하는 아기 때문에 화장실 한 번을 마음 편히 갈 수 없고, 낯선 사람이 등장하면 경계하는 아기 때문에 아기를 상시 꼭 안고 있어야 한다. 아기에게 엄마는 곧 세상이자 우주다. 신의 존재를 모르는 아기들에게 엄마는 신과 같은 존재다. 오죽하면 우리는 ‘Oh my God!’ 대신에 ‘엄마야’ 라고 하지 않는가. 엄마가 짊어진 한 생명의 무게는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 하지만 엄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체력도 정신력도 고갈된다. 육아 외의 다른 것들은 남편이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안다, 남편도 힘들다
하지만 남편도 할 말이 있다. 나라고 밖에서 놀고 오는 건 아니다! 육아휴직 중인 부인과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더욱 가열차게 일할 수밖에 없다! 나라고 아기를 보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이것이 가장의 무게인 것을 어쩌겠냐! 남의 돈 버는 건 뭐 쉬운 줄 아나. 집에서 남의 눈치 안보고 아기와 둘만 있는 부인이 오히려 더 편할 수 있다. 남편들은 필히 이런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밖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왔는데 집에서는 편히 쉬고 싶은데 집에 오니 지친 아내 때문에 눈치보이고 새벽마다 우는 아기 때문에 잠도 설친다. 나라고 뭐 안힘든 줄 아나.
황희 정승님 말마따나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상황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얄밉고 남편은 아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적어도 아기 양육에 관한 한, R&R 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다. 아무리 아빠가 육아휴직을 쓰고 함께 양육한다고 해도, 주양육자는 엄마가 되기 때문이다. 아빠와 아무리 잘 노는 아기도 잘 때는 엄마를 찾는다. 아빠가 없어졌다고 우는 아기는 없지만 엄마가 없어지면 아기는 운다. 우리집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가사일을 하면 꼭 내 손길이 추가로 닿아야만 한다. 육아나 가사에서 역할분담이 모호한 영역이 생기면 십중팔구 엄마이자 주부의 몫이다.
워킹맘의 꿀팁 - 슬기로운 R&R 나누기
1. 가화만사성 - 집에서의 R&R을 해결하는 팁은 결국 양보와 타협이다
회사에서의 R&R을 집에서 그대로 벤치마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R&R의 포맷을 따라할 수는 있지만 회사에서처럼 명문화하거나 제대로 가르마를 타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회사에서에 비해 집에서는 남편과 나, 단 둘만이 팀원이고 업무의 영역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R&R을 나눠 놓아도 계속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일이 추가되고, 그때마다 R&R을 정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우리집의 경우 부엌일과 청소 관련된 것은 내가, 거실 정리는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공통 및 교대로 한다는 큰 틀 안에서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가령 내가 단축근무를 해서 퇴근하고 아이를 하원시키고 놀아주고, 밥먹이고 있으면 남편이 7시쯤 귀가한다. 그때부터 한두시간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고 나는 설거지며 부엌 정리를 한다. 아이는 잠잘 무렵이 되면 엄마 껌딱지 모드로 돌변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졸려하기 전에 집안일을 마치는 것이 좋다. 내가 아이와 잠을 자러 들어가면 남편이 거실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10시 전에 잠잘 준비를 마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어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적이 허다하다. 하지만 위의 대원칙 하에서 움직이면 그럭저럭 충돌을 피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2. 럭키비키잖아! & 오히려 좋아!
남편은 많은 장점이 있는 사람이지만, 치명적인 단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너무 게으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잠이 많다는 것이다. 유난히 부지런하고 근면성실한 아빠와 오빠를 보고 자란 나는 남편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이해’보다는 ‘암기’가 필요한 순간이 더 많다. 이해하려고 시도하다가 욱하느니 차라리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라고 외우는 게 싸움을 피하는 길이다. 분명 아침에도 나보다 늦게 일어나고 낮잠까지 자는데 왜 맨날 피곤하다고 하는지, 집안일은 내가 훨씬 많이 하는데 왜 저렇게 생색을 내려고 하는지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냥 그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내가 더 많은 일을 감당해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부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슬기롭게 집안일을 떠넘기는 것을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뭔가를 덜하려는 생각 대신 사고의 틀 자체를 바꾸는 것이 내가 깨달은 R&R 해결의 가장 큰 팁이다.
남편보다 내가 잠을 더 적게 자고 더 많이 움직이는 덕분에 나는 살이 찌지 않는다. 출산 후 체중을 회복하는 데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고, 아이가 돌 무렵이 되자 오히려 출산 전보다 살이 빠졌다. 복직 무렵에는 출산 전보다 체중이 줄었다가, 복직해서 밥도 잘 챙겨먹고 아이를 쫓아다니는 시간도 줄게 되니 체중이 늘었다. 뿐만 아니라 기분도 좋아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이래저래 회사를 다니는 것은 나의 천직임이 틀림없다. 게으른 남편 덕분에 다이어트가 필요 없으니 럭키비키하고, 복직해서 영양상태가 좋아지니 럭키비키하다. 게다가 집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다가 회사에 가면 내 업무만 하면 되는 회사일은 전혀 힘들지 않게 느껴지니 오히려 좋다.
결론: 가까이 보면 손해, 멀리 보면 이익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인 것 같다. 출산과 육아는 무조건 여자가 손해보는 과정이다. 왜 저출산이 되는지 알 것 같다. –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의 평화는 깨지고 가정의 평화 또한 위협받는다. 내가 더 손해보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집안에서는 큰소리가 나고, 아이는 정서불안에 시달린다. 워킹맘이 아니라 엄마라면 늘 명심해야 한다. R&R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의 평화다. 억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기 때문에 워킹맘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가까이 보면 손해지만 멀리 보면 이익이다. 좋은 리더는 입으로 일하지 않는다. 행동으로 보인다. 남편이 집안일과 육아에 리더십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리더십을 보이면 된다. 내가 행동하고, 남편을 조금씩 참여시키자. 남편에게 내가 더 많이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집안일에서 프로세스를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을 찾자. 그것이 육아템이 됐든, 시스템이 됐든.
기약없는 희생을 계속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는 자라고, 언젠가 엄마 손을 떠나는 날이 온다. 선배맘들의 말에 의하면 오래지 않아 육아가 수월해지는 날이 온다고 한다. (나도 아직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 때까지 몇 년을 참아 최고의 아웃풋-가정의 평화와 아이의 정서 안정-을 이룰 수 있다면 해볼 만한 희생이 아닌가. 기억하자. 리더는 마지막에 먹고, 워킹맘은 마지막에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