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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Nov 15. 2018

어른의 수능일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수능을 보는 꿈을 꾸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른다. 수능을 치르고 꽤나 오랜 햇수가 지날 때까지도 수능일마다 악몽을 꿨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특목고였던 탓에 상위권 대학이나 의대 진학 비율이 높았다. 내가 졸업한 대학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는 자랑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대학생이 된 해방감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1, 2년의 시차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지금이지만 열아홉, 스물 무렵에는 일 년이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수능을 다시 응시할 용기가 그 때에는 없었다.

수능이나 대학입시에 대한 원죄의식은 두고두고 남아 있었다. 마음 속 깊이 지박령처럼 붙어 있는 죄책감 때문에 무슨 일을 할 때나 신중해지고 소심해졌다. 입시 결과를 만회하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쩌면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도 떨쳐지지 않을지 모를 후회 같은 것. 어리석은 일이었다. 사실, 뉴스에 나올 정도의 일이 터지지 않는 한 남들은 내 일에 별 관심이 없다. 잠시 관심을 가졌다 한들 제 앞길이 급급하고 나 먹고 살기 바빠 그 관심을 내게 고정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열아홉, 혹은 스물 언저리의 아이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늘의 시험 성적에 누군가는 뛸 듯이 기뻐하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눈물을 삼킬 수도 있다. 수능 점수가 발표된 날 친구들과 함께 한강 고수부지에 갔다. 고등학교는 5호선 역 근처에 있었기에 우리는 5호선을 타고 여의나루 역에서 내렸다. 뛰어들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내년에도 시험을 보아야 할까 혹은 새내기가 될까, 부모님이 속상해 하실텐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지금은 실소가 터지지만 당시에는 생사를 고민할 만큼의 무게로 다가온 문제였다. 우리는 또 정답 없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춥고 배가 고파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하철역 앞에서 파는 호두과자를 사 먹으며 강물에 뛰어들 생각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부끄럽거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솔직해져야겠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니었다. 더 지나고 보았을 때는 더 괜찮아지기 위해 우리는 각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상하게 수능에는 재능이 없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입시 결과에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대학 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도 하기 전에 대기업의 연구원이 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위해 이를 악물고 고시에 매진했던 친구는 7년 만에 합격을 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꺾고 혼자 유학을 떠난 친구는 말로만 듣던 '연하 꽃돌이'를 만나 잘 살고 있다. 엄친딸로 기대를 모으던 친구는 돌연 진로를 바꿔 요리연구가가 되었다.

지나고 보면 그것은 어른이 되는 시작점이었다. 따라서 수능의 의미는 시험 성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능의 종료와 고등학교의 졸업으로 인해 진입하게 된 성인의 세계에 들어설 준비가 되어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시험 성적은 늘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대박'을, 누군가는 '쪽박'을 경험한다. 인생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겪는 것과 동시에 성인의 관문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것은 스무살 안팎일 때의 이야기다. 길게 보면 인생은 공평하다는 것을 몇 년만 지나면 깨닫게 된다. 그래서 불평하거나 한탄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그저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유일한 돌파구라는 것을.

그저 고생했지, 잘했어, 하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데 사실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내가 가장 부러운 삶이라는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너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을 거라는 속내를 털어 놓으면 이 아이들에게 너무 심한 일이 될까. 경제성장률이 자꾸 하향 조정되고 고용시장의 한파가 한겨울의 추위보다 더욱 긴 냉각기로 체감되는 지금. 수능이 끝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마냥 기뻐야 할 아이들을 보며 어쩐지 또 미안해진다. 너희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닌데. 그래도 어른이랍시고 좀 더 긴 세월을 살아온 까닭에 자꾸만 오랜 죄의식이 고개를 쳐들고, 어른이 된 나는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오늘 수능을 치른 많은 아이들은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오늘도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이제 내가 수능일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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