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박은정 역(문학동네)
생각해보니 기원 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이전,
최초로 전쟁이 기록된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전쟁사는 모두
남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전승되어 왔다.
분명 전쟁의 역사 속에 여성도 있었을텐데.....
모든 여성들이 전쟁의 뒷편에 물러앉아
남편을 기다리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텐데......
이 책은 세계2차대전 중 나라를 위해 거침없이 전쟁 속으로 뛰어든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생각지도 못했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나라면?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게도 그녀들과 같은 용기가 있었을까?
읽는 내내 가슴이 아프고, 무섭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전쟁 앞에선 모두 패배자이다.
침략으로 억압받고 찢긴 이들도,
정복으로 짓밟고 빼앗은 이들도,
전쟁이 끝나면 상흔이 남고,
마음 속 깊은 곳에 병이 깃든다.
전쟁에 정당성과 당의성을 부여하는 얼간이가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p.17-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반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또 어떤 사람은 두세페이지만큼의 역사를. 우리는 함께 시간의 책을 써내려간다.
-p.26-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물하는 존재.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 안에 생명을 품고, 또 생명을 낳아 기른다.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p.29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사는 게 쉽지 않다오.... 푼돈에 지나지 않는 형편없는 연금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오.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우리가 위대한 과거에서 쫓겨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누추한 현실로 내몰렸다는 사실이오."
-p40-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p.42-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었다.....나는 나의 여주인공들과 긴 여정을 지나왔다.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p.59-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 게 검은 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 색이지.....
-p.83-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했어.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갔어.....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p.133-
또 한번은 보초를 설 때야. 새벽 2시에 다른 병사가 교대하러 왔는데, 그냥 돌려보냈어. '네가 낮에 보초 서. 밤엔 내가 그냥 할게'라며 가서 더 자라고 했지. 밤새, 날이 밝을 때까지 내가 보초를 서기로 했던 건, 새소리가 듣고 싶어서였어. 딱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지. 밤엔 고향을, 평화로운 지난날을 느끼게 하는 그 뭔가가 있었거든.
-p.135-
폭격은 밤에야 끝이 났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이 내렸지. 우리 병사들 주검 위로 하얗게... 많은 시신들이 팔을 위로 뻗고 있었어.... 하늘을 향해..... 행복이 뭐냐고 한번 물어봐주겠어? 행복.... 그건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야...."
-p.144~145-
전쟁은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속에 새겨넣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넣었다.
-p286-
"전선에서 내가 제일 두려웠던 건 어린 시절 추억이었어. 그래, 바로 내 어린시절. 전쟁터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그건 안 될 일이었어....전쟁터에선 금기였지."
-p377-
"기차 안에서 열이 나더라고. 뺨이 부어오르고 입도 벌릴 수가 없고. 사랑니가 나고 있었어.....나는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
-p.392-
"1월 1일에 남편을 묻었어. 그리고 38일 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지. 1944년에 태어나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어. 남편 이름은 바실리였어. 아들 이름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우리 손자도 바샤야.... 바실료크...."
-p.409-
전쟁터에서는 모든 게 너무도 빨리 일어났어. 삶도 죽음도. 겨우 몇 년 사이에 우리는 그곳에서 인생 전체를 산 셈이지.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도 설명을 못하겠는 거야. 그곳에선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는 걸......
-p.421-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린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p.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