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징가 계보학

권혁웅(창비)

by 소연



한 때 나름 문학소녀였던 나는
지금도 입에 붙어 맴도는 시 몇 편이 있다.
그 때의 시들은
단어 하나하나 구슬처럼 예뻤고,
연과 연 사이의 빈 줄 마저 사랑이 가득했다.

나이가 들고,
세상이 시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된 지금
나는 구슬처럼 예쁘고 사탕처럼 달콤하기만 한 시 보다는
내가 잊고있던 무언가, 잊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자꾸 건드리는
그런 시를 찾아 읽게 된다.

박준이 그랬고, 백석이 그랬고, 권혁웅이 그러했다.

권혁웅의 시는 필름과도 같다.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달동네가 눈앞에 펼쳐진다.
솜틀집, 관짜는 집, 수퍼가 보이고,
용구네, 정복이네, 주인집 누나, 유자씨
동네 사람 하나하나가 무성영화배우처럼 각닥각닥 지나간다.
그가 읊조리는 그 시대, 그 동네, 그만그만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웃음을 미끼로 눈물을 잡아챈다.

그래, 그 땐 그랬지..... 하기엔
너무 많은 가슴이 꺼지고 터진
그 시절, 우리의 이야기....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 어디 누군가의 이야기....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반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수면>-
(...)
용구 아빠는 술을 먹으면 솜 트는 기계가 솜을 부리듯 아이들을 편편해질 때까지 두들겼다 세 아이가 이불처럼 넓은 마당에 널리곤 했다 솜틀집에는 먼지가 많았고 솜트는 기계는 쉬지 않고 이불솜을 지어냈고 이불솜은 구름처럼 폭신했다 용구네 아이들은 똘똘해서 모두들 그걸 타고 승천할 거라고 했는데,

먼저 승천한 사람은 용구아빠였다 (...)

-<드레곤> 중에서...-
그는 어둠의 지배자였다 동굴처럼 패어나간 골목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점프컷으로 날아오던 남자가 있었다 한경어고 뒤편은 달의 뒷면과 같아서 꼬불꼬불한 내부를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달빛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골목 저쪽에서 전전반측, 그가 날아왔다 불운한 이들이 길을 잃을 때마다 그는 검은 날개를 펼쳐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곤 했다 불우한 이들이 비명을 듣고 뛰쳐나와도 한번도 그를 본 적은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는 어둠의 지배자였다 여자들이 가슴에 품은 두 개의 달, 그 빛 아래서만 그는 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배트맨>-
3.
용구 엄마는 지아비와 막내를 제 가슴에 묻고는 가끔씩 주먹으로 앙가슴을 치곤했다 부자가 답답하다고 안에서 끙끙댔기 때문이었을 게다 허리가 굽어가면서 그녀의 봉분도 서서히 깎여, 평토장한 무덤이 되어갔다

-<무덤의 역사> 중에서...-
(...)
어느날, 새우눈을 가진 직원이 판을 엎었다
손가락 없는 직원의 서툰 손재주가 문제였다
허리 아픈 직원은
다친 허리 때문에 엎드려 있었고
말리던 아버지만 소주병에 맞았다
아버지 혼자 피박과 광박을 다 덮어썼다
병을 깬 직원은 청단처럼 서슬이 파랬고
병에 맞은 아버진 홍단처럼 얼굴이 붉었다
마당의 닭들이 고도리처럼 날아올랐다

청단처럼 푸르른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
하지만 어느날
동네 아저씨들, 장작 몇개 집어들고는
해피를 뒷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왈왈 짖으며 용감한 우리 해피, 뒷산을 타넘어
내게로 도망왔지요
찾아온 아저씨들, 나일론 끈을 내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해피가 네 말을 잘 들으니
이 끈을 목에 걸어주지 않겠니?
착한 나,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줬지요
지금도 내 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 있습니다
내가 여덟살, 해피가 두살 때 얘기입니다

-<돈 워리 비 해피> 중에서...-


** 미처 옮기지 못한 더 많은 시들.... 덤덤해서 더 가슴이 먹먹한 그의 시들을 꼭 한번쯤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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