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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May 14. 2020

The 확찐자는 걷는다

Good morning!

코로나19로 많은 것을 잃은 요즘, 확실하게 얻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살'이다.

처음 '확찐자'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을 때엔 이런 시국에 뭐 저런 걸로 말장난을 하나 싶었는데, 모든 게 멈춘 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 이젠 개학연기, 이동 자제가 놀랍지도 않을 만큼 코로나 19에 익숙해져서인가보다.


어찌됐든 나는 '원찐자(원래 찐 자)' 에서 '확찐자'를 넘어 'The 확찐자(더 확 찐 자)'가 되었다.

소싯적과 비교하는 것이 하등의 의미가 없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 때와 비교하면 20키로 가까이 쪘으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겐 써프라이즈요, 우리 부모님께는 걱정이요, 우리 서방한테는 놀림거리요, 내게는 버거움이다. 만약 예년처럼 모든 게 그대로 돌아갔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모두 올 스톱인 요즘이라면 가능하겠다 싶은 <아 침 운 동>..... 전형적인 올빼미인 나는 새벽에 눈 뜨는 게 밤을 새는 것 보다 힘든 사람이기에 새벽 운동은 상상도 못 할 일이고, 저녁엔 이런저런 잡다한 취미생활들 때문에 일 분 일 초가 아까운지라 하루 중 꼭 운동을 해야겠다면 오전이 가장 좋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오전 운동을 시작할 만큼 운동 의지가 강하지도 않지만......


나는 오전에 가장 의욕이 강하다. 그래서 정말 하기 싫은 집안일이며 귀찮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은 오전 중에 하려고 한다. 나에게 오전의 마지노선은 딱 11시이다. 11시가 넘어가는 순간, 그 이후는 더이상 오전이 아니고, 불타오르던 의욕은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정오라도 지나면 만사가 다 귀찮아지고, 청소고, 빨래고 내일로 미루고만 싶어진다. 그렇게 엉덩이가 소파와 붙어 그 이후엔 앉아서 할 수 있는 것들과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가급적 나의 운동시간은 오전의 마지노선을 넘겨선 안된다. 아니 그보다 일찍 이어야 한다. 그래야 운동 후 대략의 집안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늦잠을 자는 아이를 두고,  출근길의 서방을 따라 나섰다. 그대로 동네 하천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 지 이틀째. 이 동네에 이사 와 산 지도 벌써 6년이건만, 이렇게 좋은 산책로가 있는 줄 이제서야 알았다. 무려 10km가 넘는 하천으로 옛날엔 오염이 심했지만, 지금은 생태 복원 사업으로 저어새가 살 정도로 깨끗해졌다. 심호흡을 하고, 운동화 끈을 바짝 조여 맨 후 산책로에 들어서니 길 옆의 풀이며 꽃들이 아침볕에  반짝인다. 세상에...... 이렇게나 예쁜 곳이었다니......





새하얀 꽃이 가득한 이팝나무 아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마스크 때문에 2배는 더 달아오른 얼굴을 산들 바람이 불어와 식혀준다.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잠시 마스크를 벗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말린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하고, 풀향은 싱그럽고, 초록은 상쾌하다. 아침에 걷는 거, 참 좋구나......


10여분의 달콤한 휴식을 끝으로 온 길을 되돌아 간다. 어느 새 운동 나온 사람들이 꽤 보인다. 10분의 휴식 동안 다리가 풀렸는지 되돌아 가는 길은 다리가 더 무겁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아까 본 풍경들을 다시 본다. 해가 어느 덧 높아져 풀이며 꽃이며 또 다른 느낌이다. 분명 어제도, 오늘도 본 풍경인데 어제와 오늘의 느낌이 다르다. 같은 점이라면, 어제나 오늘이나 참 예쁘다는 거......





하천 산책로 어디에서든 대로로 나오는 길에는 공원이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하천을 따라 공원이 길게 연결되어 있고, 그 공원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로 하천 산책로인 것이다. 하천길의 땡볕이 힘들때면 계단을 올라 공원길을 걸으면 된다. 물론 공원 길은 중간중간 대로를 건너기 위한 신호등을 마주해야 하지만, 그런 멈춤 뒤엔 각 공원 별로 오래된 나무터널과 황토길, 자갈길, 등나무길 등등 피톤치드 가득한 테마길들을 고루 걸을 수 있어 좋다.  우리 집으로 연결된 공원은 오래된 철길 같은 나무길이 있다. 아이처럼 통통통 나무길을 뛰어 대로로 나왔다.


6km.

내가 오늘 걸은 길이다.

8850.

내가 오늘 걸은 걸음수이다.

1시간 24분 14초.

내가 오늘 걷기에만 오롯이 집중한 시간이다.


아직 이틀째인 나는 몸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다거나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거나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다만 아침 햇살에 어깨를 펴는 무수한 풀과 꽃을 보는 게 좋고,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그 시간이 즐겁고, 걷고난 뒤 흘린 땀이 시원하고, 그렇게라도 자연을 만끽하는 게 행복할 뿐이다.


나는 The 확찐자에서 벗어나려 걷기 시작했지만, 이만큼 걷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될까 싶지만,

변화가 없어도 뭐 어쩌랴.

대신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또 한 순간을 찾아낸 것을.


나의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게 해 줄 진짜 

"GOOD MORNING"을 찾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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