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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병원에 들어가실 땐 단풍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었는데, 나오실 땐 장미가 한창이었다. 할머니는 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퇴원을 하셨다. 집에 계실 땐 항상 짧고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셨는데, 병원에 계시는 동안은 파마를 할 수가 없어 파마끼 없는 커트머리로 나오셨다. 귀 뒤로 단정히 빗어 넘긴 모양이 마치 세련된 모델처럼 예뻤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은 해를 못 봐 더욱 뽀예지셨다. 늘 어딘지 탐탁치 않은 표정이셨는데, 이 날의 할머니는 눈도, 입도 동글동글 웃고계셨다.
“할머니, 집에 오니까 좋죠?”
내가 물으니 할머니는 활짝 웃으시며 “좋다.” 하셨다.
짭잘한 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병원밥이 안먹힌다 하셨다. 간이 맹탕이라 도저히 안넘어간다 하셨다. 그래서 오이지를 얇게 썰어 떨어지지 않게 병실로 보내드리곤 했었다. 이제 집에 오셨으니 싱거운 반찬을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된다. 나는 적당히 짭잘하게 만든 국과 반찬들을 차려놓고 할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할머니, 어때요? 입에 맞으셔?”
할머니는 또 고운 미소를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응, 맛있다.”
잘 드시는 할머니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아이나 어른이나 잘 먹고, 잘 드시면 그게 그렇게 신날 수 없다.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우신 할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으시며 내게 말했다.
“고맙다.”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머니를 쳐다봤다.
“나도 다 알아, 너가 나한테 잘 하는거…..”
순간 뭘 어쩔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결혼생활 16년 만에 할머니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고맙다.” 그 소리가 귓가에서 계속 울려퍼져 가슴을 흔들었다.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나는 상을 채 치우지도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엉엉 울었다. 나의 살림솜씨를 미더워 않던 할머니, 내가 소파에 앉아있으면 혀를 차던 할머니, 드라마를 핑계로 내게 욕을 하시던 할머니는 곱고 예쁜 치매를 안고 집에 오셨다. 괜찮네~ 소리가 가장 큰 칭찬이었던 양반이 내게 고맙다 하셨다. 잘한다 하셨다. 다 안다 하셨다.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하고 뜨뜻했다.
‘이렇게 예쁜 치매라 제가 더 고마워요, 할머니. 건강하게 집에 오신 것도 고맙고, 내게 고맙다 해주신 것도 모두모두 고마워요.’
나는 할머니의 치매를 감당할 자신이 생겼다. “고맙다” 그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는 깜깜할 것만 같았던 앞으로의 돌봄 생활에 빛을 반짝 비쳐주었다. 마치 해리포터의 빛의 주문 “루모스!” 처럼.
그래서 할머니의 치매는 예뻤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할머니의 예쁜 치매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할머니는 피붙이를 제외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미워했다. 억울해하고, 서러워했다. 화를 내셨고, 물건을 던지셨다. 점점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셨고, 점점 내게 의지하셨다.
힘들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울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할머니가 정말정말 미울 땐, 저 날의 “고맙다.” 이 한마디를 떠올렸다. 어쩌면 할머니가 진짜로 내게 하고싶은 말, 이제는 잊어버렸지만 가슴 속엔 꼭꼭 숨어있는 그 말.
“고맙다. 나도 다 알아, 너가 나한테 잘 하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