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교과 전담교사로 살아남기
첫 시간 활동을 시작한다고 알렸더니, 두세 명의 학생이 이렇게 외쳤다.
"쌤, 이거 하면 간식 있어요?"
학급 운영을 할 때도 간식을 많이 활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굳이 집에서 챙겨 온 간식을 하나씩 전해주는 고사리 같은 손을 그냥 돌려보내기가 뭣해 그래도 간식 몇 가지는 구비해 뒀다. 그리고 학급 운영하다 보면 아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어, 고마운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을 앞두고 간식 있냐고 물어보는 아이들은 없었다. 6학년이라 그런 것인지, 전담 시간이라 그런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황당했다. 꼭 간식 있어야 열심히 하겠다는 협박처럼 들려서 유쾌하진 않았다. 그래서 "간식은 없다"라고 대답했다. 황당한 표정과 함께 정색하며. 하지만 다른 반 수업 때도 이 일은 반복되었다. 아니라고 해도 오늘은 간식 있냐고 재차 물어보는 아이들의 간절하면서도 장난기 섞인 물음에 "간식 있냐고 물어보는 일이 없어지면, 그때 간식 구비를 고민해 보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랬던 일단 간식 주냐는 질문은 사그라진 상태다. 그러고 나서 간식에 대한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일단 간식을 아이들은 완전히 '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상은 교육심리학적으로 아주 오래되었고 가장 흔하게 활용된 흥미로운 개념이다. 처벌이 아동 인권 이슈와 함께 점차 사라지며 그 자리는 칭찬을 포함한 보상이 대신하게 되었다. 보상은 학습자가 잘하기를 바라는 특정 행동이나 반응을 했을 때, 이를 강화하기 위해 제공하는 강화물의 일종이다. 기쁨, 즐거움, 뿌듯함과 같은 내적 보상과 물질들을 제공하는 외적 보상이 있는데 간식은 외적 보상에 속한다. 간식과 같은 외적 보상이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이게 정말 아이들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을까?
끝까지 내가 간식을 상처럼 주는 걸 고민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주객전도. 외적 보상이 언제나 공부, 학습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 학습의 목적은 영어 학습 그 자체에 있다. 간식이라는 외적 보상이 있다가 없어졌을 때 과연 아이들은 영어 학습을 이전과 같이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의문이다. 둘째, 영양 문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장기에 아이들이 섭취하는 음식의 중요성을 더 많이 보고 느낀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럴지도) 안 그래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슬슬 자기 용돈으로 각종 여러 가지 간식을 사 먹는 데다 요즘은 유튜브로 인해 탕후루, 마라탕 등 자극적인 음식이 트렌드다. 그런데 나까지 영양적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간식 섭취를 보태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 이유는 보상의 편중. 보통 시험을 잘 보는 아이들이 중간 퀴즈나 활동, 게임 등에서도 대부분 좋은 결과를 거둔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시험에서도, 각종 활동에서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얻는 셈이다. 하지만 영어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둘 다에서 그 어떤 것도 반복적으로 얻지 못한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간식을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모둠별로 퀴즈를 풀고, 맞추면 캐러멜같이 말랑말랑한 캔디를 주셨는데 그거 집에 가면 있는데도 학교에서 왜 그렇게 먹고 싶던지, 기를 쓰고 퀴즈를 맞히려고 예습, 복습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유난히 간식을 좋아해서 더 그랬던 것일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주는 간식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확실하다. 다만 인생에 때때로 행운으로 기분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희망과 수업 분위기를 함께 좋게 만들었을 때 선생님도 기쁘다는 걸 전해주고 싶기는 하다. 그래서 결국 간식을 주문했다. 뽀로로 비타민 사탕으로. 학습에 대한 보상보다는, 즐거운 영어 수업에 대한 축하와 감사의 의미로 간식을 활용하고자 한다. 과연 나의 계획대로 간식을 잘 활용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