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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하는 삶, 나는 자유다.

고미숙선생님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하는

by 유랑행성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직접 남겼다는 묘비명이다. 나는 어떤 글귀로 나를 표현하고 싶을까.

조르바를 표현하는 단 한 가지 단어는 '자유'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공간도, 마음도 유동적일 때에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얘기한다.


머무름이 안정감을 만든다. 그 안을 체우며 우린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 술이나 커피, 달콤한 케이크와 같이 절제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우리를 끌고 다니고 구속한다.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낄 때 좀 더 감각적인 즐거움에 집중하게 되고 어느샌가 우린 지배당한다.

중독된 그 무언가가 우리의 시간과 정신을 차지하고 마니까.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떠돌아다니는 부랑아 같은 모습이 정답인 걸까? 그게 지금 세상에 말이 되는 건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조르바의 '자유'가 실제 내 삶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는 딱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구속하거나 붙들리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삶.

지금껏 회사생활만 해 온 너무도 평범한 내가 조르바의 '자유'를 기치로 변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걸까?

말 그대로 모든 걸 집어치우고 당장 떠나라는 건 아닐 테니. 우린 모두 안다.

조직의 보호막 안에 부품처럼 자리를 잡고 큰 진폭 없이 반복되는 삶이 한정적이라는 것.

자의든 타의든 떨궈지는 순간보다 '자유'가 어떤 삶인지 잊고 지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잠시의 머무름이 몇십 년이 된다. 몸도 마음도 무뎌진 초로의 어느 날 '필요성'이 다해 원 밖으로 튕겨져 나왔을 때 시간과 선택권은 더 이상 '자유'로 불리지 못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채 맞이하는 열린 가능성과 시간은 살아내야 하는 숙제처럼 다가온다.


내 첫 여행지는 친구가 유학하고 있는 호주였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챙겨간 여행책자가 없어지고 내겐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친구의 수업 시간엔 친구를 기다리며 대학 도서관과 카페테리아에서 시간을 보냈다. 1일 투어를 신청해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온종일 그의 일정에 맞춰 지냈다.

공강시간에 같이 돌아다니고 유학생들 모임에 함께 참석하면서.


그때 내가 느꼈던 건 '일상의 소중함'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곳에 난 아무도 아니었다.

내가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고 내가 해야 하는 일도 없다는 것. 혼자 동그라니 앉아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내겐 큰 충격이었다.


홀로 세상 밖으로 나갔던 진짜 여행이지만 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달랑 챙긴 여행책자가 없어져 막막했다는 핑계 아닌 이유도 있었지만 어느 한 부분도 매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자유'의 가벼움보다는 매여있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불안감이 크게 다가왔고, 내 자리가 맞춰져 있는 '일상'이 그리웠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삶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뭔가 안정감을 주는 울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난 수십 번의 여행을 다녀왔고 혼자 가는 여행도 척척 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원하는 일상과 사람들로 나의 삶을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매임에 안도하고 가끔씩 휴가동안의 자유만큼만을 즐기고 있다.

딱 정해진 시간 동안만 풀어졌다가 요요처럼 정확히 줄이 엮인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나의 삶은 사실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뭔가 다른, 떠돌이로만 여겨지던 조르바가 이젠 삶의 모습을 반추하게 만드는 캐릭터가 된 이유는

더 이상 안락함과 안정감이 진정한 삶의 가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여행을 통해 정해진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보다 멀리, 오래갈 수 있는 연습을 하며

나는 그렇게 조금 더 유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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