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는 마음과 선택으로 남는 마음의 차이
어느 순간부터 ‘순수함’이라는 단어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함을 뜻하는 말처럼 쓰이곤 한다.
예전에 나에게 순수함은 지켜내고 싶은 어떤 상태였다. 세상에 살면서도 쉽게 물들지 않는 마음.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태도에 가까웠다.
어릴 때 나는 순수함을 깨끗함이라고 생각했다.
구정물 속에 있어도 탁해지지 않는 물처럼, 외부 환경과는 무관하게 유지되는 상태 말이다. 무지와는 다른 것이라 믿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지나온 뒤에야 겨우 남을 수 있는 모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있었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볼 때마다 그것이 보호된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의 균열을 모른 채 유지되는 평온함이라면, 그것은 가치라기보다 유예된 상태에 가까운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를 너무 빨리 깨뜨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순수함’이라는 말을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순간은 대학 시절 농활에서였다.
프로그램의 일부는 시골 아이들에게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의 불합리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구조를 일찍 이해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장면을 보며 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어차피 살아가며 알게 될 일들인데, 굳이 지금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그들의 천진함이 조금 더 오래 남기를 바랐다.
그 문제로 선배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끝에서 선배가 물었다.
“순수함이 뭔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순수함이 무지는 아니라는 생각만 분명했을 뿐,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건지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말한 순수함은 현실을 잠시 가려두는 얇은 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평온함이라면, 그것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태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랫동안 그 질문은 남아 있었다.
순수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현실 앞에서 쉽게 부서지게 만드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도 명확한 답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순수함을 더 이상 보호받는 상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수함은 세상을 몰라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알면서도 냉소로 기울지 않으려는 선택에 가깝다. 현실을 이해한 뒤에도 어떤 기준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는 태도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순수함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삶을 견디게 하는 방향을 결정해 준다고 느낀다. 세상과 부딪히면서도 완전히 같아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기준처럼.
언젠가 누군가가 내 안의 그런 마음을 알아보고, 그것이 약함이 아니라 오래 붙들고 살아온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이해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나는, 오래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조금은 제대로 대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