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건 사귀자마자 알았다. 달라서 끌렸고, 그의 다름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거라 기대했다. 이보다 완벽한 조화는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의문과 알아차림의 엇갈림은 이별로 이어졌다. 이해를 구하는 끝없는 과정의 연속, 이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랑이 어떻게 이해나 논리 앞에서 무너지는가?
서로를 겪을수록 상충된 면이 이토록 심각할 줄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헤어지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갭이 컸던가? 사랑이냐 아니냐를 고심하기 전, 우리를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인지. 정체성으로 파트너를 선택하는지. 그럼에도 이유와 조건을 뛰어넘어 결정짓는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 서로 넌더리가 나는지.
나와 통화를 일분 정도 하면 그는 두통이 온다고 그만 끊기를 원했다. 그 이유가 바로 나의 맹점에 있었다. 성적 본능은 말할 때, 주목시키는 거지 연결이 아니란다.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보편적이고 공통된 주제로 서로를 이어주는 소통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개인적인 이야기에만 꽂혀 말한다는 건데, 맞다. 난 소몰 토크나 대중엔 관심이 없었다. 침투하는 대화, 집중된 에너지에 그는 진절머리가 난 거였다.
난 그에게 뭘 더 보냐고, 왜 그렇게 관찰만 하냐고, 이해를 못했다. 성적 본능은 상대를 알아보는 과정을 생략한다는 걸 새롭게 배웠다. 별 관심 없는 사람이거나, 나와 융합된 오직 한 사람. 딱 두 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우리-성적 본능인 사람들- 사이엔 공간이 있을 수 없다고. 아예 모르거나 아님 다 알아야 하거나. (난 일체감이 좋은데, 그는 독립된 객체로서 연결감을 원하니… 서로가 느끼는 친밀감이 이리도 달랐다!) 이거야 원…
사회적인 이들은 마음을 읽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상대를 계속 본다고 한다. 추구하는 가치관, 공동의 목표와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탐색한다고. 자신과 파트너 사이에 공간을 두고 조심스레 넘나들면서 말이다.
아, 그래서 그의 품속에 내가 담길지 아닐지. 그걸 계속 본다는 거였구나. 자기 곁에 계속 있을 사람인가가 굳이 재혼의 조건이라면 조건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이 났다. 그 말 뜻도 모르고,
“아니 사랑하면 쭉 계속 옆에 붙어있는 거지, 어딜 가?”라고 말했다.
나 같은 성적 본능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의존하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또 남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고. 그러고 보니 뭔가를 주고자 할 때,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냥 ‘좋아하겠지’ 나 혼자 만족하고 주는 걸 반복했다. (어쩜 이렇게 일방적일 수 있지? 내가 이랬다는 걸 이제 알게 되다니!)
오로지 내가 지향하는 바만을 위해 행동했다. 그의 기분을 헤아리거나, 그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미쳐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내 구미대로 그를 이해한 척한 거였다.
얼마나 나를 어필하고 싶으면 그랬을까? 동시에 거부당할까 봐 보호본능 또한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럴수록 더 맹목적이고 처절하게 나 자신에게만 꽂혀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이런 내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이기적으로도 봤을 것이다. 아, 나만 쌓인 게 아니겠구나 싶다.
생각해보니 어느 일요일, 그에게 연락이 없어 불안, 짜증,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디 아픈가? 화났나? 어디 간 건가? 뭐 하는데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왜 지?’
2시 반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오후 5시에 다시 시도했다.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30분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 했다. 그냥 ‘쉬고, 자고, 전시회 기획서 만들고 또 쉬고’ 그랬단다.
“왜 연락 안 했어? 까먹었어?”
“응. 연락할 생각을 못했네.”
우리의 연애에서 내가 더 힘들다고 말한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연인 사이에 매일매일 소통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난 생각했다. 애인에게 연락하는 게 그에게는 신경 쓰지 않으면 뒷전이 되는 일이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본인도 사회관계나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 희생한다고… 그만큼의 에너지를 빼기 위해 애쓴다고 하면서, 그 누가 더 힘든 게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아무 일 없이 편하게 있었지만,
난 통화된 오후 5시 반까지 불안과 짜증과 염려로 기분이 완전 다운되었어.
이게 나는 힘들다는 거야.”
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평화가 깨진 걸 알았다.
맹점을 신경 쓰면 실제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즐겁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맹점이 퇴화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적 본능을 1차로 쓰고, 자기 보존이 2차다. 안타깝게도 이런 유형은 어떤 대상과 깊이 관계를 맺는 것에 저항이 있다고 한다. 저항하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 큰 대상, 혹은 세상과 연결되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혼도, 전 여자 친구와 이별도, 그가 추구하는 삶-세상과 예술 문화에 헌신하고자 하는- 에 힘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서 헤어진 거구나. 나 또한 그가 에너지를 쏟고자 하는 것에 저해가 되는 순간 바로 끝이겠구나.
대게 일요일 오후는 나른하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를 위해 쉬는 게 필요하다. 상황과 컨디션에도 상관없이 보고 싶으면 보는 게 사랑이라고 나는 알았다. 그는 보고는 싶으나 참고 쉬게 하는 배려가 사랑이라 했다. 특히 아무 말없이 믿어주고 편안하게 내버려 두는 게 그가 원하는 사랑이다. 이때 그는 생기가 돌았다. 반면에 사랑한다는 표현과 칭찬을 들을 때 나의 생동감은 절정이다.
“당신은 언제 질투를 느껴요?”
“다른 남자에 의해 나의 여자가 행복감을 느낄 때?”
‘다른 남자가 그러기 전에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면 되잖아.’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잠시 멈추고
막상 물어본 말은,
“당신은 언제 행복해요?”
“나로 인해 나의 여자가 행복할 때”
무엇으로 행복하게 해 준다는 걸까? 언제 내가 행복한 지 알고 하는 말인가?
그는 사회적 본능이면서 5번 유형이다. 이런 유형은 타인과 관계 맺는 데 더욱 신중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위협이 느껴지면 재빠르게 자기 보존 본능 모드로 전환한다고 한다. 사회적인 영역을 중시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사회와 단체에 투자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웰빙의 이슈로 쉬면서 왜 나를 만나지 않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보고 싶다고 애원하고 토라져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렬한 연애감정이 그의 선택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본능은 생존을 위해서 항상 작동하고 있다. 에고는 너무 이기적이다. 날 지켜주지 않는다. 에고와 자아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막강한 에고에 잠식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