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함'을 버리니 추억이 되다
창피: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함. 또는 그에 대한 부끄러움.
다 같이 떠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여행, 자이살메르
나를 포함한 남자 셋, 여자 셋 6명이 인도 여행을 처음 떠난 맥글로드 간지에 이어 완전체로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여행, 자이살메르로 떠났다. 첫 번째 여행에선 서로가 다 같이 친하기보다 그 안에서 친한 사람들, 어색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하나의 그룹으로 떠났다면 첫 번째 여행 이후 부쩍 친해진 우리는 자이살메르 여행을 준비할 땐 누구보다 친한 여행 공동체 그룹이 되었다.
보통 어학원 안에서 여행지가 정해지면(보통 인도의 대표 여행지 중 하나) 같이 갈 멤버를 구하고, 여행을 다녀온 뒤 하나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다 같이 간 첫 여행 맥글로드 간지는 어학원을 벗어나 어딘가에 콧바람을 쐬러 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뜬 여행이었는데, 자이살메르는 맥글로드 간지처럼 콧바람 쐬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20시간 남짓 뉴델리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 장거리 여행이었기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가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여행 전 서로 찾아보고 밤마다 방에 모여 어떻게 루트를 짤 지 토론하며 더 많이 준비해 간 여행이라 기대도 컸다.
왜 자이살메르인가?
대부분 인도에서 낙타 투어를 하면 조드푸르를 많이 가는데 왜 자이살메르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학원 현지인 선생님의 강력 추천으로 자이살메르가 '골드 시티'라는 소리에 혹해서 남들과는 다른 선택인 자이살메르로 가보자라고 정했던 기억. 시내 안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던 어떤 정자(?)가 예전에 금으로 지어졌다가 지금은 그게 다 떨어졌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금처럼 반짝이는 정자가 있다는 말에 아마 이것 때문에 자이살메르로 결정했던 기억. 근데 생각보다 볼 게 없어서 당황스러웠던. 하지만, 자이살메르 여행은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내 인생 여행 탑 3에 들었다.
인도에서의 기차여행
베드가 제공되는 기차여행은 처음이었다. 인도 기차 역시 버스처럼 가격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우리는 최고급까지는 아니고 두 번째 정도(에어컨 나오고 침대 나오고) 등급의 좌석을 예약했던 걸로 기억한다.
인도에서의 기차여행은 버스 여행만큼이나 연착의 친구였는데, 아무래도 철도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지 않아서인지 뭐만 하면 연착이었다. 그럴 때마다 또 등장한 인도의 국민음료, 짜이. 역에 정차하면 기가 막히게 짜이 아저씨들이 창가에 붙어 짜이를 판다.
원래 기차 시간은 16시간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연착에 연착이 이어지며 아무리 자다가 일어나도 기차는 계속 달렸다. 그렇게 긴 시간 함께 하다 보니 이제 서로의 인생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소재마저 다 떨어질 때쯤. 아마도 나는 내가 대학을 들어간 뒤 가장 끈끈한 커뮤니티로 느꼈던 우리 동아리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우리 동아리에서는 매년 연말 학술제라는 명목 하에 신입생들의 장기자랑을 선보이는데, 우리 기수는 12명이라 팀을 나눠 춤을 췄고, 내가 속한 팀은 보아의 발렌티와 후레쉬맨이라는 엽기 컨셉으로 발렌티를 열심히 추다가 갑자기 색색의 타이즈를 신고 나타나 후레쉬맨으로 강렬하게 끝내는 장기자랑을 선보였더랬다.
갑자기 누군가 발렌티를 보고 싶다고 했었나. 마치 할아버지 환갑연에서 손주에게 장기자랑 시키는 것처럼 언니, 오빠들 중 누군가 나의 춤이 보고 싶다고 했고, 밤이 깊어져서인지 선잠을 자서 몽롱해서인지 나는 별다른 거부 없이 흔쾌히 그리고 호탕하게 보여주겠노라 기차 복도에 나갔다.
그렇게, 자이살메르 행 기차에 아시아의 별 보아가 등장했다.
'에이, 모르겠다!' 보아에 빙의해 눈 딱 감고 한 곡을 춰버렸다. 많이 부족하지만(당시엔 폰에서 노래가 나오지도 않았기에 육성에 맞춰) 열심히 추는 나를 보고 손주 손녀 이뻐하듯 언니 오빠들은 즐거워했고, 평상시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나 춤추는 걸 극혐하는 내가 왠지 모를 보람감과 관종러의 기쁨을 스치듯 엿보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데 늘 괜찮다 겸손 떨며 서로 밀당하지 않고 시원하게 내가 잘하는 걸 보여주겠노라 나서는 솔직함과 통쾌함, 그리고 그런 가식 떨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해방감을 느꼈다. 막내로서 귀여움 받던 시절.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후회는 평생 간다
최근 어떤 예능에서인지 드라마에서인지 누군가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후회는 평생 간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나간 순간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기쁜, 슬픔, 눈물, 그때그때 내가 느끼는 바를 표현하고 살기도 아쉬운 시간이다.
창피의 사전적 의미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함. 또 그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내려놓는 일은 체면이 깎이는 일도 아니꼬운 일도 아니다. 사실 체면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도착한 자이살메르
자이살메르는 자이살메르 포트라는 성곽 안에 세워진 도시인데 그 성곽이 금색처럼 보여 '골드 시티'로 명명되었다. 성곽 안에 도시가 있는 형태, 사막 한가운데 위치해 요새처럼 다양한 나라들의 침략도 방문도 많아 무역으로 흥했던 도시는 이제 낙타 사파리 투어로 유명해졌다. 1100년대 지어진 건물 안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타이타닉에서 묵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작되는 호객꾼들과의 신경전. 그렇게 돌고 돌아 우리는 타이타닉에 정착했다. 뷰 좋고, 방 깨끗하고, 사파리 투어 가능한 곳.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사막투어로 떠났다.
낙타를 타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낙타의 등을 타니 보이는 시야가 엄청 높았고 나중엔 낙타를 너무 타서 엉덩이가 쓰라리기도 했다.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긴 바지에 상체는 스카프로 꽁꽁 싸맸는데 신기하게도 모래가 안 들어간 곳이 없다.
자이살메르의 사막은 처음엔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고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지는 뜨거운 태양에 사막의 능선이 일렁이는 그런 사막을 기대했건만 바닥이 쩍쩍 갈라진 가뭄진 땅만 이어진 현실적인 사막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가 우리가 자게 될 곳에 당도하니 고운 모래, 내리쬐는 태양, 내가 생각했던 사막이 정말 딱 내 시야 안에 펼쳐졌다.
그리고 꼭 잊지 말고 언급하고 싶은 사막에서 마주한 귀여운 쇠똥구리. 쇠똥구리를 그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다. 낙타가 똥을 정말 많이 싸는데 걷다가 중간에 멈추면 투포환 쏘듯 동그란 똥이 후두두둑 나온다. 그럼 쇠똥구리는 그 똥을 열심히 굴린다.
알고 보니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각자 낙타를 타고 가는데 일부 낙타가 이런 투어에 숙련된 낙타가 아닌 것 같았다. 자꾸 길을 가는데 일행 중 하나가 탄 낙타가 폭주 본능을 참지 못하고 빠른 걸음도 아니고 달렸고, 자꾸 다른 낙타에게 시비를 걸어 둘 다 위험해지는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폭주하던 낙타에서 일행이 떨어졌다. 다행히 모래 위로 떨어져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낙타는 경주마처럼 그런 대회에 나갔던 낙타라고 했다. 질주본능을 참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막에서 1박 하는 투어를 선택했는데 그냥 맨 사막 바닥에 카펫 같은 걸 깔고 잤다. 나중에 사막투어를 다녀온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텐트나 침낭을 제공한다는 거다. 이래서 쌀 때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그럼에도 추천하는 자이살메르 낙타 투어
내리쬐는 태양, 엉덩이가 까질 듯이 아파도 낙타 투어는 살면서 꼭 해보길 추천한다. 이왕이면 인도 자이살메르에서. 그날 밤, 고운 모래 위에 카펫을 깔고 나란히 누운 우리는 오빠들이 가져온 위스키를 맛보고 횡설수설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본 하늘, 수억 개의 별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써야 하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 정도면, 정말 온 세상의 별을 다 박아둔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기억. 이렇게 고요한 사막에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경험 만으로도 그간의 힘든 여정은 눈녹든 녹아내렸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마치 마법에서 깨어나 다시 개구리가 된 공주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낭만적인 밤은 꿈처럼 느껴지고 사막의 아침엔 6명의 노숙자가 누워있었다. 아침에는 같이 간 스텝들이 아침을 차려주었다. 삶은 계란과 커리를 즉석에서 난과 함께 만들어 주는데. 뭘 먹어도 다 모래가 씹혀 나는 별로 안 먹었던 기억.
갈수록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식 없이, 내숭 없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힘들어져 간다. 아마도 그간 상처받은 기억이 나를 겹겹이 감싸는 것 같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체면을, 창피함을 내려놓고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또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관계의 짜릿함은 연착이 거듭되는 기차여행의 노고를 녹여주는 사막의 반짝이는 별빛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