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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Aug 10. 2022

인도, 마날리로 향하는 버스 여행 중 산사태를 만나다

'조급하다'를 지우고, 순간을 즐기다

조급하다: 참을성이 없이 몹시 급하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인도 여행 해프닝 하나

요즘 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스콜성 폭우로 당황스러웠던 추억을 선사한 인도 여행이 떠오른다. 인도의 북부 마날리로 향하던 길이었다. 2007년, 인도 버스 여행의 또 다른 이름은 '연착'이었다. 당시 인도는 산길 도로 등이 정비가 잘 안 되어 있어 난간도 없고, 도로 바닥에 아스팔트도 안 깔려 있는 곳이 많아 비가 오면 산사태에 무방비였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멈추면 안 되는 곳에서. 


멈추면 안 되는 곳에서 멈춘 버스

인도에서 첫 여행 때 급하게 버스를 예약하느라 가장 저렴한 버스를 탔다가 창문도 없이 창살만 있는 버스에서 고온다습한 인도의 바람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마날리 여행 땐 그래도 돈을 더 내고 2등급 정도의 버스(에어컨 나오고, 좌석도 편안한 우리나라로 따지면 우등버스 정도)를 쾌적하게 타고 가고 있던 터였다. 


내리던 빗줄기는 굵어지더니 버스 창을 사납게 들이치고, 큰 통창으로 되어 있던 버스 맨 뒷좌석은 젖기 시작했고, 뒷좌석에 일렬로 쪼르르 앉아있던 우리 일행의 등은 다 젖었다(무려 2등급인데!! 내 돈). 그렇게 쉴 새 없이 내리치던 비,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도로 중간에 멈추었다. 멈추자마자 인도 현지인들은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 와다다 내리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챙겨 온 체스 테이블을 펴고, 

티 팟에 물을 올리고(대체 이건 왜 갖고 다녀 ㅎㅎ) 짜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우린 이게 뭐지, 무슨 상황이지, 얼마나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는 거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잔뜩 안고 기사와 승객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Only GOD Knows.." 인도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이런 신의 뜻이다, 신의 응답이다, 신 만이 안다 등 신 타령을 많이 마주하게 되는데 역시나 이들은 현자였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우리 앞에 앞에 버스가 위치한 지점쯤 도로에 토사가 쏟아져 도로가 끊긴 상황. 사상자는 없는 것 같았는데 토사를 치우기 전엔 모든 버스가 올 스탑이었다. 다행히 비는 주춤했지만 앞서 얘기했듯 인도의 도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정비를 할 수 있는 차량이 오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릴 테고, 모든 것이 우리나라처럼 시스템이 있어 착착 진행되지 않기에.. 


그렇게 막연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넘버 원, 넘버 투?

그런데, 이런!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도로 중간에 멈춘 버스, 당연히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 위장이 약한 나, 인도에서 지낸 3개월 내내 지리한 물갈이로 시달렸다. 역시나 협조적이지 않았던 내 방광과 대장은 인도의 물갈이를 만나 쌍박의 시너지를 냈는데.. 


어쩌지 싶은데 갑자기 인도 현지인이 다가와 물었다. "넘버 원(소변) or 넘버 투(대변)?"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당시 나의 영어 실력이 그랬다. 넘버 원이라고 얘기하니 뒷산을 가리킨다. 자신을 따라오라며, 덕분에 잘(?) 해결을 하고 어느 정도 영어를 하는 현지인은 우리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도로에서 즐기는 짜이 한 잔

짜이 한 잔 하지 않겠냐, 조급해 봤자 다 소용없다. 출발할 때 되면 출발한다 등등. 그의 말은 그냥 하는 말 같았지만 묘하게 안심되었다. 


조급해한다고 해결될 일인가? 당신이 버스를 출발시킬 수 있는가?
여행 중 산사태가 나 인도의 이름 모를 도로 위에서 현지인과 짜이 한 잔을 하는 사람이 흔할까? 


쏟아지는 아저씨의 일련의 질문에 나는 모두 '아니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일을 해결하고 와서인지 나도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차피 걱정한다고 버스가 빨리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출발할 때 되면 출발하겠지라는 마인드로 순간을 즐기는 현지인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짜이는 인도식 밀크티로 그냥 밀크티와는 확연한 차이의 향과 맛을 가지는데,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인도식으로 재해석한 밀크티로 홍차 잎과 우유를 끓이고 거기에 생강(가루인지 진짜 생강인지), 설탕을 넣어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생강향이 어우러져 엄청난 매력의 짜이로 탄생한다. 그리고, 이 맛은 인도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다. 갓 끓인 짜이는 비에 쫄딱 젖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조급함을 내려놓아서인지 짜이의 향긋함이 더 깊게 느껴졌다.


당시엔 해결하지 못할 상황에 대해 핑계를 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인도 아저씨의 말처럼 조급함을 내려놓고(어쩌면 포기하고) 그렇게 짜이 한 잔을 마시며 우리가 가게 될 목적지인 마날리에 대한 얘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버스는 다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그 이후 수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다시는 없었다.


Only God Knows

어쩌면 인도 여행 중 만난 현지인들에게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인도를 제대로 여행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인도는 여행지로서 호불호가 강한 곳인데, 다시 인도를 찾는 여행자들은 이렇듯 여행 중 마주치는 현자와의 만남, 깨달음을 주는 여행을 잊지 못해 다시 인도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렇게 장장 38시간 만에 도착한 마날리.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갔던 마날리는 어렵게 도착한 만큼 세계 3대 명산인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은 짜릿한 풍경을 선사했다.

인도의 알프스로 불리는 마날리 풍경, 길거리를 다닐 때 구름 속을 걷는 듯 하다

그렇게, 나는 '조급하다'라는 단어를 내 사전에서 지웠다.


조급함을 지우고 순간에 집중하다

당시에 어린 나는 인도 아저씨가 남긴 그 말이 그리고 그 당황스러웠던 순간이 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이 인용되고 곱씹게 될 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이후로 인도에서든 한국에 돌아와서든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났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상황인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서면 단번에 조급함과 걱정을 내려놓고, 그 순간을 즐기려 노력한다. 


우리 인생에서 맞이하는 많은 순간 중 우리의 계획대로 되는 것은 많지 않다. 아니, 계획대로 되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그렇게 갑자기 마주친 난관 앞에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무력함을 알면서도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일에 조급해하며 발을 동동 구를지,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순간을 만끽할지.

마날리에서의 패러글라이딩, 나 였던가?
함께 갔던 언니, 오빠들 모두 그립다
어쩌면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당시엔 힘들어도 돌아보면 깨달음을 주는 순간들이 있다. 일상에 치어 눈앞의 조급함에 시야가 가려 내가 놓친 순간은 얼마나 많을까? 이토록 인상 깊게 자리하는 순간들이 앞으로 자주 있지는 않겠지만 조급함을 내려놓고 지금에 집중하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간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더 오래 기억하고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늘 같이 비온 뒤 습하고 조금의 냉기가 감도는 밤, 갓 끓인 인도의 짜이 한 잔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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