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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Sep 28. 2016

천 개의 눈

하나의 이름

***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 의지 혹은 시각 체제 -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


엄마, 아내, 며느리, 딸, 언니, 누나, 처형, 형수, 제수, 동서, 형님, 이모, 고모…….

어느 날 갑자기, 또 서서히 아주 다양한 호칭이 생기더니 늘어갔다.

얘네들이 다 누구인가?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나’ 없이 지낸 결혼 초기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전쟁터였다.

나는 그토록 다양한 시선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러 종류의 관계로 인한 조언이나 간섭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를 만나야겠다는 것을.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거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처럼 맥 빠지는 말이 없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으면, 잘 사는 거였다.

참을 수 없었다.


누구도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지만, 특히 ‘내 엄마’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내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 병원에 다녀간 엄마는 아빠에게 맞았다.

집을 비워서였을까? 아빠의 저녁밥을 챙겨주지 못해서였을까?

엄마의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나는 부모에게 묻지 못했고, 마주 쳐다보지도 못했다.

남편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아이를 안고 울었다.

이제 어떻게 살까? 하고.


부모를 외면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명절증후군, 누군가는 시가에서 겪는다는 그걸 나는 본가에서 경험했다.

명절 때마다 위장에 탈이 나서 위장약을 까먹으며 다니곤 했다.

해로운 만남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과 헤어진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본가에 가지 않는다.

언젠가 내 맘이 더 넓어지면 가능하려나?

내 어미에 대한 연민이라도 생기게 되면 찾아가려나?

모르겠다.


지금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을 피하고 있다.

그곳에 쓰는 에너지가 상당하다.

특히 ‘내 엄마’는 아주 힘들고 어렵다.

내 딸들의 시선과 자기검열까지 보태면 그야말로 못할 짓이다.


애들 아빠는 묻는다.

부모도 남편도 외면하고 이젠 아이들 차례냐고.

나도 궁금하긴 하다.

아이들과 사는 요즘, 내가 왜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애들 아빠의 물음에 나도 답을 하고 싶다.

좋아서 살고 싶다고.

제발 좀 좋은 사람이랑 살아보고 싶다고.

책임감 같은 거 말고, 의무감 이런 거 말고, 내가 좋은 거, 아님 마는 거.


다 큰 딸과 산다는 건 새로운 종류의 관계이다.

친구처럼 살고 싶다고 했지만, 전혀 친구일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독립은 아이들도 포함된 거였지만, 어느새 다 커버렸다.

이제야 가능해진 나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까?


여전히 나는 관계에 미숙하다.

돼지처럼 아무거나 잘 먹는다.

그래서 누가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머릿속이 하얗다.

먹다 보니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좋아하는 건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물으면 알려주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좋은 느낌’인데, 난 이럴 때가 좋아,라고.

그때까진 싫은 거 골라내느라 바쁠 것 같다.


결혼을 정리하고, 본가를 가지 않으니 그 많던 호칭들이 몽땅 사라졌다.

‘엄마’만 남았는데, 얘는 지금 숙제다.

버릴까 말까 생각 중이다.

진짜다.


인제 와서 못할 일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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