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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Sep 27. 2016

천 개의 오후

고병권과 니체

***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자는 문을 두드리고, 열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는 나뭇가지를 흔든다. 우리는 무작정 기다리는 자들, 허구한 날을 기다리는 자들, 그렇게 땅을 지키고 가게를 지키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만 우리는 기다렸다 말할 수 있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기다림이란 실천이다. 그것은 도래함을 향한 맞이함이고, 다가옴을 향한 다가섬이며, 열매를 향한 무르익음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철학자는 영리하고 박식한 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모험과 시도를 감행하는 '달갑지 않은 바보'다.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죽어지내는 현자'가 아니라 별 가망 없는 일에 뛰어드는 '살아 있는 바보' 말이다.


니체는 '네 자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자, '네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나'를 이중화했다. '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기다림'은 '되어감(생성)'과 같다. 나 자신을 기다리는 행위가 나 자신이 되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기다려보았는가. 나는 나를 어디까지 시도해보았는가.


- 『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 중에서


***


10년 전쯤, 고병권의 니체를 숙제처럼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읽겠다고 하고는 손대지 못했다.


나에게 안식년을 선물한 시간에 『언더그라운드 니체』(2014)와 『다이너마이트 니체』(2016)를 읽으면서, 다시 읽으려던 두 권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니체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소명출판, 2001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고병권, 그린비, 2003


***


누군가가 따라놓은 물로 반쯤 채워진 유리잔으로 살아왔다.

얼마나 채우다가 그만둘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반은 내 손으로 채우고 싶어서 니체를 찾았나 보다.

내 인생에 대한 ‘즐거운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말이다.


고병권의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법’이다.

진정한 사랑은 맹목적 복종도 아니고 폭력을 동반한 지배도 아닌, 그 대상을 아름답게 창조해 주는 것이라는 해석은 감미롭고 부드럽다.

니체 사랑법의 핵심에 들어있는 ‘창조와 생성’은 단호하고 엄격하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다시 만날 약속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니체를 읽는 고병권의 매력적인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니체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고병권의 글은 꼼꼼하고 친절하다.

반복해서 설명하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린다.


지난 시간이 언제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천천히 니체와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나의 시간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누가 할 수 있을까?

‘결혼’에 대해서 ‘무엇인가?’ 대신에 ‘어떤 것인가?’, 혹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도 좋겠다.

니체의 기획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일이니까.


아직도 나에게는 니체를 만날 천 개의 오후가 남았다.

내가 되어가기 위해서 내게 찾아가서 나를 기다리겠다.

달갑지 않은 바보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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