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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Mar 28. 2017

미안하자

10일째

뭔가 한참 지나간 것 같으면서도 아직 진행 중이다

산다는 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주저앉아 울면서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다

아니, 갈 곳은 알겠는데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내가 숨이 막힐 듯이 갑갑하다

하루가 1년, 아니 10년쯤 되는 것 같다

이 또한 꼭 필요한 시간일까?

무엇을 머뭇거리며 망설이고 있을까?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

남편을 놓는 미안함에 주저하고 있는 건가?

결혼 생활을 버리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건가?


엄마는 전화로 나를 걱정한다

엄마 자신을 걱정하는 소리로만 들리는 나는 대화에 몰입할 수가 없다

엄마, 엄마가 원하는 딸로 살지 못하고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그냥 미안할게요


동생들도 전화로 나를 걱정한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당분간 빈자리일 테니까 그러려니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알아서 지낼 거라고, 엄마나 챙기라고 했다

친정과도 거리를 두고 싶다고, 미안하지만 그냥 미안하겠다고 말하고는 끊었다


시집 식구들은 남편에게 맡기면 될까?

알아서 하려니 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시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그냥 죄송하기로 했다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고, 알아볼 곳도 마땅치 않다


아이들도 마음에서 놓자

어차피 끈은 끊어졌다

그냥 미안하자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최선이었다

나 아닌 누군가를 챙기기엔 너무 작고 보잘것없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나날이었다

멈춰서 돌아보니 아등바등하면서 살아온 내가 보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안 해도 뭐랄 사람도 없었다

미련하게 살아온 결혼이란 책임을 내려놓는다

결국,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한없이 기다리느라 버텼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누군가 나를 알아주겠지, 하는 허망한 기대를 접는다

버릇처럼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게 내 욕심이었다

욕심이 눈을 가려서 나에게서 점점 멀어졌고 바스락거렸다

이제야 나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관계를 끊는다


부모형제, 남편, 아이들, 그 곁에 있는 다양한 이름의 내 가면을 벗자

그냥 나로 살아보자

껍데기를 벗은 나는 누구인가?

맨 얼굴의 나를 보고 싶다


시간이 나를 이리로 데리고 왔다

또다시 다른 어딘가로 데려다 주려나?

그전에 잠시 쉬어가도 되겠지?

내게도 미안할 시간을 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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