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임대인이 되길 포기한 날, 생존이 시작되었다.
새 임차인이 계약한 지 1년쯤 연락이 왔다.
"저희가 진급도 하고 원하던 곳으로 발령이 나서요.
시세대로 전세를 내놔도 될까요?"
두 번째 임차인마저 잘되었다니
소중한 내 집이
나에게도 좋은 운을 줄 것 같아서 그저 좋았다.
하지만,
내 집은 멀리 떨어진 나보다
거주하는 임차인의 행복만 들어주는 듯했다.
새 임차인과의 계약날.
유학 간 딸과 사위가 한국에 돌아온다며
거주할 집을 대신 찾는다는 강남 아파트에 거주하는 할아버지였다.
기다리던 손주까지 생겨 보는 날만 손꼽는다는 그 할아버지는
도배한 지 4년 된 실크 벽지 대신,
취향에 맞춰 새로 하고 싶다는 말에
난 이럴 수도 있구나 만 생각할 뿐이었다.
"비싼 실크벽지로 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벽지를 새로 하시는 거예요?
아유~ 자식분들이 좋겠어요."
부동산 사장님은 호들갑이었다.
누가 알았겠나.
이때가 새 서막의 시작인 것을.
"그전 임차인이 망가트린 듯싶은데
인덕션 손잡이가 망가져있네요"
불편해서 바꿨으니 수리비 입금해 주세요"
집주인이 이런 건 해줘야지."
사후 통보였다.
협의는 없었고 청구서만 날아왔다.
내 의견은 무시된 일방적인 수리비 청구에
재계약까지 한 임차인은
근처에 집을 샀다며 퇴거를 원했다.
평일 낮 2시~4시 사이만 볼 수 있다는 친절한 통보까지.
동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로 유명한 덕이었을까?
아슬아슬하게 새 임차인을 만나 다행이라 여긴 것도 잠시
난 웃고픈 현실을 보게 되었다
새로 도배한 내 집은
아이의 화폭이 되어있었다.
"아이가 없어 몰라 그래.
이 시기 애들은 다 이래"
"내 돈 주고 한 벽지인데 왜 원상복구 해!
고작 이런 집 하나 가지고 집주인 유세야?
벽지 값 몇 푼 한다고!"
떠나갈 듯한 호통 소리에 멍해졌다.
아이가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다.
당신들의 상식이 내 상식과 달랐을 뿐.
그려지고, 찢기고,
너덜거리는 문 손잡이.
나는 더 이상 친절을 구걸하지 않기로 했다.
생존형 임대인이 되기 위해,
나는 그날 '좋은 임대인'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