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지 Dec 15. 2022

김칫국물 덕분에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나갈 일이 있어 패딩을 입었다. 그렇잖아도 두꺼운 옷 위에 둔탁한 방패를 두르니 침낭 같기도 하고 몸이 둔해지는 듯했다. 나가는 김에 식탁 위의 재활용품도 버리자 싶어 물건을 집어 들고 사르르 돌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어디선가부터 시큼한 김치 냄새가 은은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칫국이 담겨있던 그릇이 새초롬하게 누워 있다.      


“아…”     


빨간 국물이 용암처럼 식탁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화산은 폭포가 되어 의자로 흘러내렸고 의자로부터 바닥으로 뚝. 뚜두뚝. 고드름을 타고 얼음이 녹아내리듯 절경을 그려었다.


“아고, 급한 것부터 대충 치우자.”     


우선 일을 보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마른행주 두 장으로 눈에 두드러지는 국물부터 닦아내었다. 대략 눈으로 보기에 말끔해졌다 싶을 때 청소를 멈추고 밖에 다녀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순간적으로 김칫국물 사태를 잊어버렸다. 눈으로 보기 깨끗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멀스멀 느껴지는 강력한 향기는 곧바로 내가 할 일을 일깨워주었다. 곧바로 창문과 문을 활짝 열고 두 팔을 걷어 청소를 시작했다. 김칫국물이 지나간 곳은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꼼꼼하게 닦아냈다. 식탁에 올려진 물건들에 혹시 국물이 튀었을까 하나하나 소품을 들며 말끔하게 문질러주었다.


다음으로 의자를 살펴보니 에구머니나 김치 냄새가 폴폴 피어났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무소음을 담당하던 테니스 공을  보니 그 안에 이미 주황 다소곳이 있다. 싹 걷어내어 쓰레기통으로 모아 버린 뒤 뻑뻑 다리를 닦아내었다. 쓱쓱 싹싹 뽀드드득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노라니, 오늘 묻은 김칫국물이 아니라 이전부터 쌓여있던 묵은 때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두 달 살다 이사 갈 집이라 제대로 마음먹고 청소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자며 바닥도 뽁뽁 소리가 날 정도로 바지런히 닦아내었다. 드디어 완성! 신발장으로 가서 한눈에 바라보니 이럴 수가, 집에서 광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식탁도 의자도 새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김주환 교수님의 회복탄력성에 대한 강의를 유튜브에서 재미있게 보았다. 인상적이었던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회복탄력성은 성공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어떠한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회복탄력성은 역경을 참아 견디는 인내심이 아니라 역경 ‘덕분에’ 튀어 올라가는 것이란 말씀 와닿았다.


“여러분 역경을 당했어요. 그다음 갈 길은 두 가지예요. 그냥 좌절하고 무너지고 말든지, 아니면 원래 있던 자리보다 더 높이 올라가든지. 둘 중 하나예요.”      


실패를 겪으면 반응은 두 가지데, 90% 이상이 좌절하고 무너진단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것을 반복한다. 떨어갔다 올라가고, 떨어갔다 올라가고. 따라서 성공의 궤도는 M자라고 하였다. 일직선으로 쭉 승승장구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한 번 쾅 떨어져 본 사람은 저기가 위구나!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바닥에 쿵 떨어지면 반동력을 갖게 됩니다. 세게 떨어질수록 더욱 반동력을 갖게 됩니다. 파워가 생겨요. 더 이상 떨어질 데가 없어. 그렇다면 파워와 방향성이 생겨 튀어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법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업적을 이루고 성공하는 사람은 지속적인 실패를 반복합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실패를 더 많이 합니다. 실패를 더 많이 한 사람이 발전을 더 많이 합니다. 잊지 마세요. 여러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셔야 합니다. 이는 적극적인 도전성입니다. 적극적으로 도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함께 높아집니다. 실패를 0만 한다! 그렇다면 성공할 가능성 역시 제로입니다.”     


돌이켜보면 대학생 때 김주환 교수님의 행복 커뮤니케이션 강의와 더불어 학과장님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과녁 이야기 모두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항구에 안전하게 웅크려 있지 말고 바다로 일단 나아가 끊임없이 파도를 맞으며 실패하라는 메시지였다. 배가 몇 번 뒤집어지고 위기를 만나더라도 부딪히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그 속에서 성장하고 자존감을 높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행복과 의미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강조하는 이 고루한 내용을 왜 반복하여 말하고 또 듣는 것일까. 말이야 쉽지만 이 ‘두려움’이란 감정이 만만한 녀석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에 유연해지기 위해서는, 실패에 많이 노출하면서 넘어지는 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탄탄한 마음 근력을 키워가는 게 제일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100번 넘어져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비웃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한 시간 내어 보내주는 고마운 관심에 땡큐베리머취! 하면 될 것이다.     


김칫국물 덕분에 식탁의 묵은 때를 벗겨냈고 집안도 깨끗해졌다. 김칫국물을 흘리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사 갈 때까지 대충 청소기로 돌리며 좀 더 다양한 먼지들과 동행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국물도 쏟고 그릇이 깨지는 날도 지 않을 것이다. 그때마다 필요한 것은 퍼뜩 일어나 쓱싹 닦아낼 수 있는 팔 근육과 마음 근육임을 기억해본다. 내가 왜 그랬을 엉엉하며 지나간 일을 잡고 좌절하다간 그대로 놓인 깨진 조각에 당장 가족이 다치고 옷들이 국물에 범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근육을 키워주는 시간은 성경 일독과 기도, 글쓰기, 걸으며 명상하기, 책 읽기 등이다. 소중한 이들에게는 또 다른 시간일 수 있을 것이다.


항구에 웅크려있지 않고 용기 내어 배를 타고 갔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모두가 훌륭한 도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꼭 눈에 두드러지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를 등원하고 집안 업무를 보고, 화장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깨끗이 해내는 것 또한 반드시 바다로 나가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면접 준비를 하는 것 또한 힘찬 항해가 아닐 수 없다.      


때로 집채만 한 파도를 만나 배가 홀딱 젖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근육을 동원하여 우이씨 툭툭 털어 옷가지를 말려버린다면, 반드시 해 뜨고.. 눈물 나게 행복한 미소 무지개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William Clark - The English Brig 'Norval' before the Wind

           


성경일독 348 day 디모데후서 1장 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