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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지 Apr 17. 2023

가만히 바라보는 것

순간순간이 그림으로 다가오는 하루의 순간들


모네를 워낙 좋아해 중학생 때부터 모네의 초록 그림을 책상 앞에 붙여두고는 자주 바라보다. 신기하게도 햇빛을 머금은 녹색 징검다리를 보노라면 힘이 났다. 그러고는 대학생 때 기어이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마을을 찾아갔더랬다. 그 싱그러운 정원의 그림 속 다리를 건넜을 때의 감격은, 마치 작품 속으로 쏘옥 들어간 듯 했다.


사물의 실제 모습을 그린다기보다는 빛을 받아 달라지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한다. 작가의 시선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YTN에서 박문호 박사님의 뇌과학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시각' 파트를 재미있게 들었는데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더라도 각자 받아들이는 모습이 다르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하긴 사람마다 눈동자와 뇌의 구조가 조금씩 다를뿐더러 있는 위치에 따라 빛의 각도가 달라지니,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 또한 밝기와 명암, 채도 등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을 상상하고 중요시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다를 테니,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생각과 감상에도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유치원 자료 준비도 할 겸 오랜만에 아이가 좋아하는 물감을 꺼냈다. 일단 과제인 파인애플을 그려놓고, 자유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우째 과일을 그리는 순간부터 엄마와 아이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내가 생각하는 파인애플 그림은 테두리를 그리고 노오랗게 몸통을 채운 뒤 연두, 초록을 섞어 이파리를 그리면 끝인데. 드니는 시작 전부터 모든 색상의 물감을 짜기 시작했다. 본인은 알록달록한 파인애플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내내 거침없는 색조합과 붓길에 침이 바싹 말라갔지만 최대한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근데.. 창의적인 건 좋은데.. 적어도 파인애플처럼은 보여야 하지 않아?" 독백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라,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왠지 꽤 괜찮아 보인다. 분명한 건 정형화된 스타일인 나는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점이었다. 멀리서 가만히 보노라니 살아 움직이는 듯 생명력이 느껴졌다.


다음 스케치북은 자유롭게 그리게 해 주었는데 실컷 알록달록 예술의 혼을 다하더니 마지막에 검은색으로 모두 뒤덮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럴 거면 뭐 하러 열심히 칠을 했어..?" 물어보니 지금 막 태풍이 몰아친 상황이란다. 그러더니 그 위에 밝은 색 물감을 또 덧칠하는 게 아닌가!


엄마로서는 물음표가 마구 생겨났지만 아이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해서 이번에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계속 보다 보니 든이의 눈에는 분명 그냥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림과 나름의 채색 위에 몰아친 그림은 전혀 다른 스토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막 기어 다닐 무렵. 식탁에 앉아 거실에서 엉금엉금 드니가 인형과 노는 모습을 보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 적이 있었다. 흘러나오던 아베마리아 노래가 감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갑자기 이 순간의 장면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베란다에 마련해 준 Eden's Garden으로 나가 물을 주고 식물을 바라보고.. 입을 쭉 내미는 특유의 집중하는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갑자기 엄마가 받은 편지를 진지하게 보며 글씨 따라 쓰기를 하고..


살다 보면 순간순간이 갑자기 모네의 그림이 되어 가슴속으로 들어올 때가 있다. 하루의 선물들이란 어쩌면 이런 순간들 인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고

덤으로 순간의 작품까지 선물 받는

소중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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