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의 인생곡선

30일 글쓰기

by 그냥

열한 살의 인생곡선 / 12월 2일


초등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담임교사들이 추천한 일곱 명의 아이를 두 반으로 나눠 일주일에 한 시간씩 만난다.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글쓰기 작법을 가르친다기보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글로 표현하도록 돕는다. 지난 다섯 번의 수업에서 우리는 그림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고, 감정 카드를 뽑아 자기 일상이야기도 하고, 또래 아이들이 쓴 글을 읽고 따라 써보기도 했다. 몇 안 되는 아이들 특성이 이제야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간파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린 꽤 친해졌고, 수업을 재밌어하는 아이들도 생겼다.

이제 남은 수업은 다섯 번. 나는 아이들과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인생 곡선 그리기’나 ‘내 인생의 한 장면 그리기’는 감정의 밀도가 높은 작업들이다. 중학생만 되어도 아이들은 주 양육자와 자신을 조금 떨어트려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지난 유년기와 현재의 고민을 그림에 잘 담아낼 줄 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하는 날은 대체로 눈물바다가 되곤 한다. 이후의 수업은 무엇을 해도 재밌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일단 해보기로 했다. 늘 그렇듯 15세까지의 내 인생 곡선을 먼저 아이들에게 소개한 뒤, 아이들에게도 지난 삶의 궤적을 수직선 위에 표시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혹 아이들이 재미없어하거나, 너무 간단히 끝날 것에 대비해 함께 읽을 그림책 한 권도 챙겼다.

아이들은 내 인생 곡선을 아주 유심히 들여다봤다. 농담하거나 비웃는 아이는 없었다. “내 이야기 진지하게 들어줘서 고마워. 이제 너희가 그릴 차례야.”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었더니 진지한 표정에 고민이 깊어지는 듯했다. 조용히 연필을 움직이던 아이들은 10여 분 만에 자신의 인생 곡선을 완성했다.

4학년인 J는 9살 때 가족 관련한 슬픈 일을 겪은 후 상담을 받았고 지금까지 그저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슬픈 일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실 나는 처음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담당 선생님께 아이의 엄마가 몇 해 전 암으로 돌아가셨단 말을 들었었다. 나는 아이에게 그때의 감정을 추가로 물었지만, J는 “그냥 슬펐어요.”라고만 말했다.

5학년인 W는 7살 때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며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냥 말을 해버릴까? 말할까?” 잠시 망설이더니 아이가 말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거든요.”

이 말을 하면서 아이는 살짝 웃었고 옆에 있던 H도 웃었다. 나는 이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힘든 일에 대해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간혹 슬픈 얘기를 웃으면서 할 때도 있더라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해서 그럴 수도 있고 슬픈 마음을 감추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내내 조용하던 J가 엎드리며 말했다.

“그때도 다 알아요.”

“뭐라고?”

“어려도 다 안다고요.”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감정을 다 느낀다는 거지?”

“맞아요.”

J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들과 인생곡선 그리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던 내가 부끄러워질만큼. 우린 마음을 나눠준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수업을 마쳤다. 수업이 끝난 뒤 우린 교문까지 같이 나왔다. 집에 가면 혼자 게임을 한다는 J, 지역아동센터에서 저녁을 먹는다는 W, 중국인 부모와 살다가 귀화해 한국말이 서툴고 외로운 H. 우리가 함께 걷는 거리에 낙엽이 가득 뒹굴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 겨울을 혼자서 맨몸으로 통과하진 않아야 할 텐데. 아이들의 고민과 아픔이 더 안으로 숨어들지 않아야 할 텐데. 남은 네 번의 수업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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