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이와 미미

내 사랑하는 반려동물

by 그냥


# 방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노란 털의 강아지는 작은 몸집에 눈이 까맣고 동그랬다. 아빠는 강아지 이름을 ‘방울이’라고 지었다. 나는 방울이가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엄마는 방울이를 만지지 못하게 했다. 만지면 옷이 더러워지고 옷에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대문 근처 마당에 줄로 묶인 방울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무언가도 함께 붙들려 매여 있는 듯 갑갑했다. 방울이가 외로워 보였고 안쓰러웠다. 엄마가 시장에 가면 몰래 방울이를 안고 과자를 나눠 먹었다. 하지만 엄마는 규칙을 어긴 아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 장면을 엄마에게 들키는 순간 가차 없는 비난과 폭언이 쏟아질 테고, 나는 순식간에 세상 몹쓸 아이가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나는 방울이를 안고서 자꾸 대문 쪽을 흘끔거렸다.

몇 달 뒤 아빠가 실직을 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엄마는 집안에 개가 잘못 들어온 탓이라며 애꿎은 방울이를 탓했다. 밥도 잘 주지 않았다.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반갑다며 목줄이 끊어져라 내게 달려드는 방울이가 점점 불쌍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개집이 텅 비어있었다. 내가 방울이를 찾자,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오전에 시장에 가서 방울이를 팔았다고. 어느 아주머니가 5천 원에 사가더라고. 엄마는 내 기분을 애써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나는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대로 시장으로 내달리고 싶었다. 분노인지, 원망인지, 슬픔인지, 분간하지 못할 감정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인사도 없이 헤어지다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내게 엄마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럼 집 나가서 개랑 살든지!

# 미미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오기로 했다. 보름 전부터 우리집 건너편 원룸 반지하방 앞에서 울던 아이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반지하에 사는 아저씨가 키우던 고양이를 밖에 내놓은 거라 했다. 하도 울고 돌아다니는 게 불쌍해 며칠 전부터 내가 몰래 밥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가 떠들썩해 나가 보았더니, 몇몇 주민들이 고양이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구청에 신고해야 한다는 얘길 하고 있었다. 당장 내일 전화를 해야겠단다. 사실 나는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 주면서, 이 고양이를 내가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계가 심한 탓에 잡을 수가 없었다. 친해지면 천천히 데려와야지, 마음만 먹고 있었다. 그런데 구청에 신고를 한다니! 급한 마음에, 내가 데려올 테니 며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반지하 아저씨에겐 베란다 문을 열어 놓고 고양이가 들어오면 내게 전화를 달라고 부탁해놓았다.

그날 저녁, 마음이 뒤숭숭했다.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를 데려오겠다고 한 걸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막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급박하게 진행될 줄 몰랐다. 돌보는 게 걱정은 아니었다. 책임감도 문제될 건 없었다. 뭔지 모를 두려움에 가슴이 두근대고 자꾸만 성급히 나선 나를 자책했다.

그때 문득, 내가 같이 사는 남편보다 따로 사는 엄마의 허락을 못 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단 걸 알았다. 엄마는 동물을 집안에서 키우는 걸 영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었다. 고양이는 요물이라고도 했다. 뭔가 집안 일이 잘못 돌아가면 고양이 탓을 할 수도 있다. 그 원망과 비난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 나이 벌써 마흔이 넘었는데, 그저 내 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 기르겠다는데 엄마가 무슨 상관인가 싶으면서도 마음 한쪽에선 여전히 엄마가 두려웠다.

그리고 방울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먹고 사느라 힘든 엄마를 탓하는 것보다 그냥 엄마 말에 수긍하는 게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단단히 내면화된 엄마의 목소리를 되짚어 볼 새도 없이 지금까지 그냥 살아 온 거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건 정말 가능한 일일까.


한참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목소리를 높이며 “절대로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 두근대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던 말, 그러나 하고 싶은 줄도 몰랐던 말, 이번 한 번만 짚고 넘어가자 다짐한 그 말을 엄마에게 해버렸다. “엄마는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야. 엄마 같은 사람은 동물 키우면 안 되지만 나는 괜찮아. 키워도 내가 키우니까 상관하지 마, 이제.”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정색한 내 말에 무안했는지 엄마가 말문을 닫았다.

3일 후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름은 미미라고 지었다. 1년 후 집 근처에서 만난 깡마른 고양이 한 마리도 식구가 됐다. 어느덧 미미와 함께 산 지 만 3년이 되었다. 엄마는 속으론 어떨지 몰라도 내 앞에선 “미미~ 코코~”하면서 고양이들과 친해지려 애쓴다. 나이가 드니 자식이 무서워진 건가. 아니면 그냥 내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 여전히 엄마의 속내를 의심하고 궁금해한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 딱 맞다. 나도, 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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