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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17. 2018

아보카도가 사는 법

앤의 과학에세이

 드디어 아보카도를 먹어봤다. 버터 맛이 나는 과일이라는데, 말만 듣고는 맛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도 궁금해서 직접 사서 먹어보기로 했다. 마침 인터넷 특가로 나온 것이 있어 냉큼 구매버튼을 눌렀다.


막 배송된 아보카도의 겉껍질은 단단했고 짙은 녹색이었다. 크기는 주먹만 했다. 표면이 오돌토돌한 것이 지금은 사라진 어떤 파충류의 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탁 위에 올려두었더니 며칠 지나 색깔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손으로 눌렀을 때 살짝 물렁하면 잘 익은 것이란다. 드디어 먹을 때가 됐다.


아보카도를 반으로 가르니 애호박 색깔의 과육이 드러났다. 처음 맛본 아보카도는 뭐랄까, 밍밍했다. 딱히 버터 맛이 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인터넷에서 소개한 대로 간장소스와 몇 가지 재료와 함께 밥에 비벼 먹으니 음, 의외로 괜찮았다.


‘버터맛 과일’에 대한 궁금증은 이렇게 해소되었다. 이제 내 앞엔 아보카도 씨앗만 남았다. 내가 먹은 아보카도의 씨앗은 탁구공만 했다. 과일치고는 열매에서 씨앗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편이다. 사과나 배, 감을 떠올려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특이한 점은 또 있다. 그동안 내가 봐 온 많은 과일 씨앗들이 단단한 외피에 둘러 싸여 있던 것과 다르게 아보카도 씨앗의 껍질은 땅콩의 속껍질처럼 얇았다. 배젖에 해당하는 부분도 색과 질감이 견과류처럼 먹음직스러웠다. 독성이 있어 먹을 순 없고, 대신 뿌리를 내려 싹을 키워 보기로 했다. 이쑤시개 세 개를 씨에 꽂아 컵에 걸쳐놓고 씨앗이 절반 쯤 잠기도록 물을 부었다. 2-3주 쯤 지나자 씨앗 아랫부분이 갈라지면서 뿌리가 나오고 얼마 후 싹이 올라왔다.


이틀마다 열심히 물만 갈아주었을 뿐 영양제 한 번 준 적이 없는데도 아보카도는 잘 자랐다. 잠깐 크는 재미만 볼 요량이었는데 쑥쑥 자라는 모습에 ‘이거 이러다 몇 년 후에 열매 맺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큰 화분에 흙을 채워 옮겨 심어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잘 자라던 아보카도가 화분으로 옮긴 후부터 잎 끝이 갈색으로 마르기 시작했다. 새로 올라오던 작은 잎도 그만 시들어 떨어지고 말았다. 뭐가 잘못됐지? 퍼뜩, 아보카도가 원래 사는 곳은 어디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보카도가 사는 곳은 울창한 열대 우림지역이다.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위로 쭉쭉 뻗은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이 나무들의 짙은 그늘로 숲속은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다. 그 어둠 속에서 드물게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아보카도가 자란다. 내가 화분을 놓아둔 곳은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는 남쪽 베란다. 초여름의 햇빛은 얇고 넓은 아보카도의 잎에게 너무 뜨겁고 날카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좀 더 햇빛을 많이 받아 쑥쑥 자라길 바랐던 내 욕심이 지나쳤다. 당장 화분을 방안 그늘진 곳으로 옮겼다. 다행히 아보카도는 다시 새 잎을 틔웠다.

그제야 아보카도 씨앗이 왜 그렇게 크고, 또 무른지 이해가 갔다. 많은 과일 씨앗의 표면이 딱딱한 물질로 덮인 이유는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겉이 무르면 습기와 균의 공격에 쉽게 썩거나 깨지고 동물에게 먹혀 소화되기 쉽다. 씨앗이 몇 달, 혹은 몇 년까지도 적당한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것도 모두 단단한 씨앗 껍질 때문이다.


그런데 열대우림 지역은 일 년 내내 온도와 습도가 높아서 언제 씨앗이 떨어져도 금방 싹을 틔울 수 있다. 굳이 어느 시기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단단한 외피는 오히려 발아에 장애가 될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양분을 얻을 수 있는 햇빛이 적다. 싹이 트려면 많은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씨앗에 많은 영양분(배젖)을 채워놓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아보카도의 씨앗에는 전분과 단백질, 지방, 설탕 등 영양소가 풍족해서 잎이 자란 뒤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배젖의 영양분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열대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과육만 필요한 인간에겐 씨앗이 큰 것이 마뜩찮겠지만 아보카도 입장에선 최고의 전략인 셈이다.


씨앗의 미션이 발아에만 있는 건 아니다. 어미나무 바로 아래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트는 데 성공하더라도 열매를 맺을 때까지 완전하게 자라지 못한다. 이미 어미나무가 땅 속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뿌리를 뻗을 곳도 부족한 데다 양분 경쟁에서도 어미나무를 이길 재간이 없다. 씨앗은 어미나무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 발도, 날개도 없는 씨앗에겐 참 답답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식물은 저마다 씨앗을 최대한 멀리 보낼 독특한 방법을 터득했다. 민들레나 박주가리의 씨는 가벼운 솜털에 매달려 낙하산을 탄 듯 멀리멀리 날아간다. 콩이나 봉선화는 꼬투리 속에 씨앗을 숨겨 두었다가 꼬투리가 터질 때 튕겨나간다. 좀 더 과감한 전략도 있다. 움직이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숲길을 걸을 때 바지나 옷에 볍씨 같은 씨앗이 잔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아 애를 먹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동물의 몸을 이용하는 녀석, 바로 도깨비바늘이다. 무궁화 씨앗에도 털이 달려 있어 다른 동물의 몸에 쉽게 붙는다.


자기희생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식물도 있다. 바로 먹히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과일은 죄다 이런 전략을 사용한다. 사과나 배, 수박 등 달콤하고 영양 많은 과육은 결코 씨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먹어 줄 동물을 위한 것이다.


지구에 사는 대다수의 조류와 포유류는 과일을 아주 좋아한다. 에너지원이 되는 당분이 많아서다. 그래서 과일의 맛과 향은 자신에게 유리한 ‘동물 맞춤형’으로 진화했다.


새는 얇은 겉껍질을 가진 작고 붉은 계열의 과일을 좋아한다. 앵두나 보리수, 버찌가 모두 새들이 좋아하는 열매이다. 포유류는 새가 먹는 것보다 크기가 크고, 거친 껍질과 진한 향의 열매를 먹는다. 색깔도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녹색 등 강렬하다. 동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열매를 먹고 (대부분 씨와 함께 먹는다) 서식지를 오가며 분변과 함께 씨앗을 배설한다. 동물의 이동경로를 따라 싹이 터 다시 열매를 맺고, 이 열매를 다시 동물이 먹는다. 식물과 동물의 서식지는 아주 깊이 연관돼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보카도는 특이하다. 지금 남아 있는 아보카도는 모두 재배종으로 야생종은 완전히 사라졌다.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야생 아보카도가 사라진 이유를 동물에게서 찾는다. 야생 아보카도의 열매와 씨앗은 아주 커서 이것을 먹고 씨앗을 퍼트릴 수 있는 몸집이 큰 동물이 필요한데 그런 동물이 지금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생 아보카도를 즐겨 먹던 매머드나 왕아르마딜로 같은 거대 동물들이 신생대의 빙하기를 견디지 못하고 멸종하면서 야생 아보카도도 차츰 사라진 것으로 본다. 한 종이 사라지는 것은 그 종과 연관되어 있는 다른 종의 존재까지 위협한다.


아보카도를 즐겨 먹는 우리 인간이 사라진다면? 아보카도는 물론이고 인간의 손에 길러져 온 수많은 재배종들 점차 사라질 것이다. 아보카도 입장에서 인간은 절대 멸종하면 안 되는 소중한 생명체일 것이다.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인간이 기대어 살고 있는 무수히 많은 동식물을 떠올려 보면, 그들의 삶이 너무나 위태롭다. 인간에겐 다른 생명체에겐 없는 아주 해괴한 습성이 있다. 바로 내가 사는 곳을 더럽히고 파괴해서 자신과 다른 동식물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과연 언제까지 종을 이어갈 수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은 다른 동식물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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