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Mar 25. 2024

역술인도 알아본 글쓰기 재능

킹받는 글쓰기 3. 글쓰기 재능이란

 


“저한테 글쓰기 재능이 있나요?”


얼마 전 글쓰기 수업 수강생이 내게 물었다. 8주 과정의 수업 중 이제 막 절반이 지난 참이었다. 질문을 듣고 생각했다. ‘또 올 것이 왔구나!’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답변을 정리해 두었지. 간단 버전과 장문 버전, 두 가지로.


마침 자리를 정리하던 중이었고 나는 화장실이 급했다.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을 챙기며 간단 버전의 답을 꺼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늘고요, 안 쓰면 안 늘어요. 재능이 있으나 없으나 이건 똑같아요. 그동안 과제 제출 열심히 해오신 것처럼 그렇게 계속 쓰시면 돼요."

  

“그렇겠죠? 재능도 없는데, 괜히 글 쓰느라 힘만 빼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내 오줌보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분은 몇 분 동안 말을 더 이어갔다. 종종 겪는 일이다. 그래도 그분의 질문과 태도가 내게 특별히 무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진짜 하고 싶은 장문 버전의 대답을 드릴 상황이 아닌 것이 아쉬울 뿐. 또 재능을 따지기엔 지금까지 과제로 낸 글 세 편은 너무 양이 적은 게 아닌가 하는 내 솔직한 마음도 티 나지 않게 속으로 꾹 눌러 담았다.


그동안 수업 경험상, 글을 몇 편 쓰고 나면 자신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증이 생기는 것 같다. ‘몇 편’이 얼만큼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두 편 쓴 후 곧장 의문을 품는 분도 있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열 편이든 스무 편이든 그저 묵묵히 글을 써내는 분도 있다.


재능 여부를 궁금해하는 이유를 짐작해 본다. 그건 글쓰기가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일 거다. 일기나 SNS, 블로그 글을 부담 없이 쓰던 사람이라도 에세이 한 편 완성하는 건 만만치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체력 소모도 꽤 크다. 게다가 결과물까지 썩 맘에 들지 않는다면 고민은 깊어질 것이다. 이걸 게속 해야 하는지, 다른 중요한 일도 많은데 괜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건 아닌지, 내게 재능 또는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건지.


사실 나는 내게 재능이 있는지 생각하며 글을 쓰지는 않았다.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완전히 우연이었다. 어떤 계기(이 내용은 다른 글에서 이야기할 것이다)로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서 무작정 지역 언론사에 과학에세이 두 편을 투고했고, 얼떨결에 연재를 시작했다. 일기 이외에 글 쓴 경험도 없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나 별다른 각오도 없었다. 그저 귀한 지면을 얻었으니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엔 글 쓰는 것이 일상의 가장 큰 근심이자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였다. 잘 쓰고 못 쓰고는 그 다음 문제였다.


글 쓰며 한 세월 보내고 보니 글 쓰기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생겼다. 내가 보기엔,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게 분명히 있다. ‘어떻게든 쓰고 싶은 마음’과 그걸 ‘실행할 이유’와 ‘지속할 힘’이 있는가. 이런 게 있다면 재능이 있든 없든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물론 어떤 이유로든 도저히 쓸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건강상 이유로 몇 달, 심리적인 이유로 또 몇 달 글쓰기를 중단한 적이 있다. ‘마음’과 ‘이유’는 있지만 ‘힘’이 없던 그 시기에도 머릿속에선 글 생각이 자막처럼 흘러 다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곧 다시 쓰리란 걸 알았다. 그러니 ‘쓸 수 있으리란 믿음’도 재능보다 중요한 것 목록에 추가해도 좋겠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좀 더 확실해진 사건이 있었다. 최근 언니가 고등학생인 조카의 사주를 봤다. 조카는 내가 봐도 공부를 안 하고, 배구와 롤게임 이외에 별 관심사가 없다. 언니 부부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조카의 진로 문제를 역술인에게 묻기로 결심한 거다. 조금 웃음이 났지만, 그 심정도 이해가 갔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조카가 글 쓰는 쪽으로 진로를 정하는 건 어떤지 역술인에게 꼭 물어보라고 당부까지 했다. 평소 조카의 글솜씨가 꽤 좋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역술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네요. 그런데 성격상 자기 스타일에 안주할 가능성이 커요. 계속 비슷한 글만 쓴다는 얘기에요. 본인이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그러니 직업 작가로는 적합하지 않고 글은 취미로 쓰면 되겠어요.”


재능이 있든 없든, 글이 직업이 되든 취미가 되든, 어쨌든 쓰면 된다는 걸 역술인도 알고 있다니!


말하기 재능이 있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있으니 한다. 디자인 감각 전혀 없어도 내가 선택한 옷을 입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설 수 있다. 쓰고 싶고 쓸 이유가 있고 쓸 힘이 있다면, 자신을 믿고 그냥 쓰면 된다.


물론 여기에 추가로 글쓰기 재능이 조카처럼 사주에 박혀 있다면 당연히 더욱 좋겠지만!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역술인 전화번호가 알고 싶어진다. 조카의 성격과 행동을, 마치 조카를 옆에서 오래 봐 온 사람처럼 기가 막히게 맞힌 용한 역술인이니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막 생각난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과연 글쓰기에 재능이 있을까? 허허, 이제 와서 이런 걸 궁금해하다니. 이것 참 킹받네, 허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