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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Apr 08. 2024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킹받는 글쓰기 4. 재능보다 중요한 것 (1) 어떻게든 쓰고 싶은 마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 이 일기장들은 내가 반려묘 다음으로 꼽는 보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스케치북에 그림일기를 그렸다. 여기에 20여 년 전 ‘싸이월드’에 쓴 일기까지 남아 있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아무튼 초2였던 1985년 4월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나는 일상을 기록해 왔다.


처음엔 숙제 검사를 받기 위해 억지로 썼다. 딱 봐도 며칠 치를 (아마도 검사받기 전날 밤에) 한꺼번에 쓴 티가 난다. 당시의 일기는 대략 이런 식이다.


1986년 4월 28일

오늘 피리를 불었다. 참, 피리가 아니고 리코오더이다. 언니는 아주 잘 불었다. 나두 연습해서 언니보다 더 잘 불어봐야겠다.


조금 구체적인 일기도 있다.     


1986년 8월 23일

오늘 우뢰매란 영화를 보러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괜히 영화도 못 보고 사람에게 밀려 차비만 들였다. 다음부턴 그런 데 가지 않겠다.


일기의 내용과 형식에 변화가 온 건 3학년 2학기가 넘어가면서부터다. 특별한 이야기가 한두 가지씩 나오고 친구들 이름도 자주 등장한다. 분량도 길어졌다.     


1986년 9월 10일

오늘 운영위원을 뽑았다. 나는 후보로 선출되었다가 떨어졌다. 7표됐었다. 아깝게 떨어졌다.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였다. 저녁때 동생의 이빨을 뽑았다. 아빠께선 “이건 안 뽑아지겠는 걸.” 하시며 흔들어보셨다. 갑자기 ‘탁’하고 (아빠가 동생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보니 동생의 이가 빼졌다.




학교에선 학급 임원을 뽑고, 집에선 동생의 이를 뽑은 이날. 지금도 어렴풋하게  장면이 머리에 남아 있다. 어쩌면  일기가 그날의 기억을 계속 붙잡아 두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록한 ,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감정이었던  같다. 운영위원 선거에서 떨어져 섭섭한 마음, 그리고 아빠의 감쪽같은 연기력에 놀라고 재밌었던 감정.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어떻게 빈 곳을 채울지 막막해하던 나는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쓰고 싶은 감정을 하나둘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날마다 잊고 싶지 않은 사건이 꼭 생겼고, 그것을 글로 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천천히 깨달았다. 이것이 일기쓰기를 강제한 선생님들이 내게 남긴 뜻밖의 선물이다.


쓰기 싫은 글도 억지로 쓰다 보면 어느새 습관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강제로 하는 건 아무래도 역효과를 가져올 위험이 크지 않나. 나처럼 일기 검사를 엄격히 하는 선생님을 만났든, 아니면 재밌는 만화책을 보며 이야기의 매력을 느꼈든, 우연히 읽은 소설에 감동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든, 단지 경험을 기록해 공감받고 싶은 마음이든 계기는 중요하지 않다.


저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그것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영상을 만들고 싶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게 아닌 그저 쓰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서너 줄의 짧은 감상이라도 써보는 거다. 머뭇거리고 미루다 보면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 테니까. 잊고 잊히는 것이 삶의 속성이라면 의미 있는 장면을 붙들고 기억하려는 건 삶의 허무에 무너지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다. 어쩌면 글이라는 건, 아무리 압도적으로 훌륭하고 멋진 글이라 해도, 이 마음 하나에서 시작하는 건지도 모른다. ‘쓰고 싶은 마음’이 모든 글의 출발점이다.


사실 위 일기엔 비밀이 하나 있다. “‘탁’하고 소리가 났다”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내 글씨체가 아니다. 이날의 일기는 두 살 터울의 언니가 마무리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좋든 나쁘든 큰 감정을 일으킨 사건을 문장으로 요약해 표현하는 건 지금의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의 나에겐 큰 과제이자 도전이었을 거다. 학급 선거 때의 감정을 되살리느라 이미 한참의 시간을 보냈을 테고, 이제 조금 전 목격한 ‘이 뽑힌 사건’으로 넘어가려니 이미 밤이 늦었다. 밤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오셨는데,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칭찬받는 걸 좋아하던 ‘모범생 언니’는 답답한 마음에 내 연필을 뺏어 쥐고는 내 일기를 대신 쓴 게 아닐까? 다른 날 일기의 마지막 문장에도 종종 언니의 글씨체가 등장하는 걸 보면 내 추측이 틀리지 않으리라. 남의 일기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남의 일기장에 빨간색 별표를 막 그려 놓던 선생님들도 그렇고, 너무한 거 아닌가. 이런 뒤늦은 킹받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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