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받는 글쓰기 7. 사전작업의 어려움
프리랜서로 글 쓰고 강의도 하는 내겐 정해진 월급이나 연봉이 없다. 아무래도 돈이 되는 건 글보다는 강의 쪽이어서, 해가 바뀌면 늘 올해엔 어디에서 강의를 하게 될지, 첫 수입은 얼마나 될지 걱정 반, 궁금증 반이다. 그런데 1월 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돈이 들어왔다. 입금자는 재작년에 책을 낸 출판사였다.
잠시 갸우뚱했으나 곧 돈의 출처를 알아차렸다. <밀리의 서재>나 <크레마클럽> 같은 전자책 구독 서비스 업체에서 지급한 저작권료가 출판사를 통해 내게 들어온 거다. 그러고 보니 이전 해 1월에도 약간의 돈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래봐야 피자 두 판 사 먹을 정도의 소액이지만, 뜻밖의 인세를 마주한 내 마음은 뭐랄까, 흐뭇하기도 애틋하기도 했다. 흐뭇했던 이유는, 아직 내 책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마주한 것 같아서. 한 사람의 독자라도 만난다는 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애틋했던 건, 책 쓸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책은 완성까지 5년이나 걸릴 만큼 공을 많이 들였더랬다. 현대의 발명품-손톱깎이나 고무장갑 등-이 없던 시절 우린 어떻게 살았는지, 이 물건들이 등장하면서 세상은 어떻게 변해갔는지 궁금증이 생겨 이 내용을 글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옛 신문 기사에서 자료를 찾고 당시 살았던 이를 인터뷰해 이야기를 구성해야 했다.
신문 기사 검색부터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포털사이트 ‘뉴스라이브러리’에는 1920년부터 1999년까지 80년 치 신문이 저장되어 있다. 여기에 ‘세탁기’를 검색하면 11,178개의 기사가 10개씩 정렬되어 나온다. 나는 제목과 미리보기 기사를 살펴 중요한 내용은 따로 파일에 저장해 두었다. 기사를 읽고 정리하는 데에만 보통 이틀이 걸렸다.
그다음은 그 변화를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을 인터뷰할 차례다. 그는 바로 1950년생인 나의 엄마였다. 엄마는 이야기하는 걸 즐기고 기억력도 꽤 좋은 편이다. 평소 나와 대화를 자주, 많이 나누는 터라 별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제안했다. 엄마 역시 별 고민 없이 승낙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짐작한 것들이 막상 되살리려고 보면 기억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다. 칠순의 엄마는 한참 아이 셋을 낳아 기르던 1980년대의 사건 선후 관계를 종종 뒤바꾸어 내게 들려주었다. 팩트가 중요한 정보를 대략 짐작해 이야기하고는 한참 후에 정정하기도 했다. 서른 번이 넘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점점 엄마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느라 신경이 잔뜩 곤두서게 되었다. 딸내미의 작업에 도움을 주려 했을 뿐 아무 잘못도 없는 엄마는 인터뷰를 마칠 때면 가끔 한숨을 쉬곤 했다.
원고를 모아 책으로 엮는 과정에선 더욱 치밀하게 사실관계를 따져야 했다. 글마다 오류를 없애기 위해 기사와 인터뷰 등 모든 내용을 쥐어짜듯 붙들고 확인, 또 확인했다. 이때 엄마를 대하는 내 모습은 어쩌면 무뢰한을 취조하는 형사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글 한 편을 완성할 때마다 세상이라는 뾰족한 바늘 끝에 나를 세우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글은 말처럼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활자로 남는 것이니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아슬아슬한 긴장과 묵직한 부담을 느끼는 게 당연하고, 빡빡한 확인 과정을 거치는 건 글 쓰는 사람의 의무 아닐까. 그렇다고는 해도 고생한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내 책이 독자를 만나는 순간을 마주할 때, 잠시 위로받고 기쁨을 느낄 뿐이다.
올해 첫 수입, 고깟 몇만 원에 감동한 썰을 이렇게 또 풀어놓고 있으려니 잠시 ‘글이란 뭘까’ 생각하며 허공을 바라보게 된다. “글 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도 떠오른다. 관심은 받고 싶고, 혹여 오류에 책잡힐까 겁나고, 그래서 이깟 돈도 안 되는 글 그만 쓸까 싶다가도 태생을 버리고 살긴 어렵고. 이 정신적 부조화의 부담을 어깨에 훌쩍 짊어지고 가는 자. 이것이 글 쓰는 사람, 작가의 정의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내게는.
(참고로, 올해 첫 수입으로는 엄마와 밥 먹고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쓴 책 제목은 ≪엄마와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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