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절망입니다.
-성 샤를 드 푸코-
절망은...
희망이 차단된 상태다.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내는 그놈은 우리를 그놈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시야를 최대한 좁게 한다. 절망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놈의 목표다. 그놈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공포와 고통은 커지고 그놈은 점점 내가 대적하지 못할 거대한 존재로 커져만 간다. 곧 내 시야가 그놈으로 가득 차면 희망은 바늘구멍 만한 틈도 차지하지 못하고 스러진다. 절망은 희망이 사라진 상태다.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극단적인 외로움에 갇혀버렸음을 의미한다.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사랑조차 놓아버린 끔찍하고 철저한 단절이 바로 절망이다. 절망에 빠지면 아무도 나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나의 절망을 위로할 수도 없다고 단정한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며 포기한다. 아무도 나의 외로움을 공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 뇌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수록 절망은 더 강해진다.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의 생각 구조를 곰곰이 살펴 보자. 나의 뇌가 이런 생각으로 빠진 과정을 생각해보자.
사람은 한 가지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소홀해진다. 분위기를 조금 전환해서, 언젠가 사랑에 빠졌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다.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면 다른 어떤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인생의 고난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내 뇌가 무시하는 것이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내 뇌가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의 아웃포커싱 현상이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은 또렷이 보지만 관심이 떨어지는 것은 흐릿하게 본다. 눈에서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뇌가 그렇게 보기 때문에 눈이 아웃포커스로 작동하는 것이다. 고난을 겪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고난으로 몰아넣는 사건이나 대상에 우리 뇌는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뇌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절망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시 절망적 상황에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우리를 절망으로 끌어넣는 그놈을 다시 뜯어보자. 그놈은 무엇인가. 그놈이 그렇게 대단한 놈인가. 그놈의 어떤 점이 무서운가.
그리고 이제는 내 생각을 뜯어보자. 내 뇌가 왜 이렇게 작동하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나는 왜 그놈 앞에서 절망이나 포기에 빠져있는가. 나는 왜 그놈에게 집중하고 있는가. 그놈은 정말 강한가,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인가. 내가 갇힌 터널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인가, 내 주변 환경이 만든 것인가. 희망은 차단된 것인가, 차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누군가가 정말 없는 것인가, 내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인가. 절망은 객관적인 사실인가, 내가 선택한 판단인가.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놈은 무엇인가.
절망하는 사람은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그것만 바라본다. 인간의 인식은 선택적 입력 시스템이다. 실제로 그놈이 더 커진 것도 아니고 더 강해진 것도 아니지만 계속 쳐다보고 있다보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놈에게 강한 존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상황이나 환경 그 자체는 실제로 삶의 장애물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람들은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상황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나에게 다가오는 그것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도 큰 일 났다며 당혹감에 사로 잡힌다. 그렇게 하면 실패해도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상황을 위험하다고 받아들이는 습관이 진짜 장애물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상황은 분명히 큰 문제가 있다. 그렇다. 당신이 처한 상황은 곤혹스럽고 큰 고통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당신에게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당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만드는 인식에 문제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먼저 내 마음을 고쳐보자. 뜻밖에도 도움은 우리 안에 이미 도착해 있다. 우리를 당혹감으로 사로잡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크게 보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누군가 치워주어도 언젠가 다른 장애물 앞에서 또다시 그렇게 당혹감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썼다. "너는 네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게 해 주며, 그 어떤 일에도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않게 해 달라고 왜 기도하지 않는 것이냐." '태풍을 멈추어 주소서'라는 기도는 하지 말자. '태풍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이 낫다. 자연의 태풍도, 인생의 태풍도 적당히 때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다. 나의 개인적 목적과 안녕을 위해서 이치를 거슬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의미 없는 욕심이다. 내 앞에 고통을 일으키는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냥 현상이다. 어차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온전히 나의 의지에 달려있다.
사하라의 은수자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이 가장 큰 죄라고 하였다.
사도 성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세상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만일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부재를 의미한다. 성경의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도 사랑은 존재의 본질이다. 그런데 절망은 사랑의 부재를 나타내므로 동시에 하느님의 부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절망에 집중하여 그것을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내 안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부재란 곧 '지옥'이다. 그러므로 절망하는 것은 스스로가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영원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절망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장 큰 죄이다. 그러나 푸코 신부는 '절망=하느님을 부정하는 대죄'라는 논리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절망에 빠져 다른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의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따질 겨를도 없다. 절망이 강력하다는 무의미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내 인식의 아웃포커싱이 절망만 바라보고 희망을 지워버리고 있지만 내가 못 보았다고 해서 희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적어도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내가 인식하지 못해도 그의 사랑은 반드시 우리 인생을 감싸고 있을 것 아닌가. 절망을 그렇게 강한 놈이라고 여겼듯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도 가능하다. 논리를 굳이 이용하자면 이것이 더 유리하니 그렇게 해보자는 말이다. 절망보다는 훨씬 유익하지 않은가.
"하느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적이 없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로마 주교좌(교황좌)착좌 미사 강론 중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터널시야(tunnel vision)에 빠져있다. 다른 방법을 돌아볼 마음이 여유가 없다. 신경과학의 발견에 의하면 우리의 감정에 작용하는 신경세포들은 뇌의 시상하부라는 곳에 모여있다. 이렇게 가까이 모여있는 이유는 만일 하나의 감정이 생성되면 유형이 다른 감정은 억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쁜 감정과 분노의 감정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상상해보라.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공포와 좌절 등의 감정이 일어났을 때 희망과 기쁨과 같은 감정들은 자동으로 억제된다. 그러므로 반대로 긍정적 감정의 신경을 활성화하면 부정적 감정은 저절로 억제된다.
이와 관련하여 하버드대 앨리슨 우드 브룩스 교수가 했던 실험이 있다. 갑자기 학생들에게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무대에서 발표를 하라고 주문했다. 다만 발표 전에 학생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고 한 집단에게는 '침착하자'라고 외치게 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신난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예상하고 있겠지만 '신난다'를 외친 집단이 유의미하게 좋은 결과를 얻었다. 또 다른 수업에서 닌텐도 wii의 노래방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도록 시켰다. 이번에는 집단을 세 개로 나누어 한 집단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두 번째 집단은 '긴장된다', 세 번째 집단은 역시 '신난다!'를 외치게 하였다. 가장 낮은 점수를 얻은 집단은 긴장을 일부러 표출했던 두 번째 집단이었고 '신난다'를 외친 세 번째 집단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긴장과 불안한 감정의 원인은 '불확실'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방어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혹시 멍청해 보이지는 않을까, 나는 음치인데 사람들이 놀리지는 않을까, 내 발표와 노래를 비웃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긴장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불안감 때문에 더 신중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더 긴장하게 된다. 이렇게 불안이 긴장을 계속해서 자극하면 침착하기 위해 끌어내는 회의적인 태도가 부정적 감정을 더 강화시켜 버리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와튼 스쿨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 교수는 회의적이고 신중한 태도는 시간이 충분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때에 효과적이지만 갑작스러운 판단이 필요하거나 긴장과 불안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에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는 오히려 독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사람에게 회의적 태도는 불안감을 가중하여 의욕을 꺾어버리는 치명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할수록 신난다, 즐겁다, 행복하다, 하하하! 등의 긍정적인 말과 소리들을 일부러 소리 내어 표현하는 것이 좋다.
마찬가지로 카이스트 뇌과학자 김대수 교수도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가장 반대의 감정인 사랑의 세포를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할 곳을 찾으라! 그러나 절망에 빠진 우리는 보통 사랑받을 기회를 수동적으로 기다린다. 내가 받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구해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기다린다. 그리고 나를 고통으로부터 구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런 귀인이 필요할 때 딱 맞춰서 나에게 온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러나 그런 기적보다 내 안에 이미 있는 기적을 살리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도를 기억하자. '나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외친 후 오히려 내가 사랑 베풀 곳을 찾으라. 사랑이 필요한 주변을 둘러보자. 뇌과학적 의미를 넘어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선포다. 세상과 나 스스로에게 선포하는 자존감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하는 것을 하느님을 닮은 행위라고 하였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당신은 신의 자녀다. 아주 간단한 것이라도 좋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사소한 봉사라도 시작해보자.
이 방법은 로고테라피 이론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의 조언과 맞닿아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프랭클은 어떻게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았을까? 그곳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프랭클 박사의 글에는 고통의 찌꺼기가 없다. 오히려 맑고 깨끗한 사랑의 호수 같다. 폭력과 욕설과 굶주림과 추위와 병마와 같은 절망의 조건이 가득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는 모든 수감자들이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말살 당하는 그 끔찍한 상황에서 프랭클 박사는 오히려 사랑의 진리를 깨달았다. 우리는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정신적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정신은 사랑이다. 프랭클 박사는 문득 떠오른 아내에 대한 생각에 더 깊이 몰두하자 수용소의 지옥같은 현실이 오히려 희미하게 느껴지는 체험을 한다. 그는 아내와의 사소한 일상을 상상했다. 그의 몸은 채석장에 끌려가 있었으나 뇌는 상상속에서 아내와 함께 소중한 일상에 빠져들었다. 프랭클 박사는 생사 조차 알 수 없는 아내에 대한 상상과 머릿속 영상만으로도 행복감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깊은 의미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내적 삶의 심화이자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 구축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랑하는 감정만으로도 절망을 깨뜨릴 수 있다.
친구를 만들자. 원래 있던 친구들이 나를 배척한다면 새로운 친구를 만들자. 아니면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좋았던 옛 친구에게 불쑥 찾아가 보자. 그냥 보고 싶었다라고만 해도 된다. 함께 커피를 마시자. 혹시 내가 뭐 도와줄 일이 없는지 먼저 물어보자. 절망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어려운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벽을 깨뜨려야 한다. 만일 나를 반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또 가면 된다. 그래 봤자 무안한 정도인데 지금 나를 괴롭히는 절망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의 시련을 비웃어라.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은 내가 악하게 태어나서, 아니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나를 겨냥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절망의 감정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시상하부의 신경세포들이 만들어낸 인식이다. 인식은 자주 쓸모도 없는 정보를 우리 뇌에 기록한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한 걸음 떨어져서 풍경 감상하듯 바라볼 수도 있다.
에디슨은 공장이 완전히 불타서 전 재산을 잃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거대한 불길에 전 재산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망연자실하던 그는 돌연 아들에게 빨리 가족들을 불러오라고 하면서 말했다. "이런 대단한 불꽃놀이를 언제 또 보겠느냐." 이를 두고 작가 라이언 홀리데이는 이렇게 평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선택할 수 없지만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안 좋게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야 했다면 흔쾌히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삶)의 목표는 '나는 괜찮다'가 아니다. '괜찮은 것 같다'도 아니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다'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쳐먹자. "우리가 역경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료이기 때문이다." 고난 앞에서도 고통만 호소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내 시상하부의 신경세포들이 사랑과 행복을 생산할 때에는 비웃음거리에 불과한 그 고난이 점점 더 큰 고통으로 오토포커스 될 뿐이다.
*참고도서
애덤 그랜트, 오리지널스
샤를 드 푸코, 사하라의 불꽃
라이언 홀리데이, 돌파력
김대수,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
정용 정재승 김대수, 1.4 킬로그램의 우주 뇌
에픽테토스,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