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눈독 들이며 볼 만한 영화도, 딱히 관심이 가는 영화도 없었다. 물론 주관적인 영화 취향의 영향도 있겠지만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작품을 못 본 지 꽤 되었다. 그러다가 오래간만에 오랜 외출을 했던 날, 겸사겸사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본 영화가 최근 개봉작인 '미성년'이었다. 영화 예고편을 통해서 대강 어떤 분위기인지에 파악을 하고는 있었고 나름 사회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미성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성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의 중심 소재는 '불륜'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분명히 고구마 1억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과 화가 또 치밀어 오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불륜의 자극성만을 드러내거나 미화하는 등의 초점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즉 중심 소재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관계성과 심리묘사의 섬세한 연출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진 역(염정아)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개인의 일상을 넘어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만 휩쓸리지 않았던 유일한 성년, 영주(염정아) 모습이었다. 배우자의 바람을 알고서도 한 여자로서보다 한 엄마로서 중심을 지키려 노력했던 배우 염정아의 연기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를 통해 자신이 책임지고 가야 할 무언가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지닌 내적 무게의 차이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미희 역(김소진)
이것은 영주(염정아)와 반대 선상에 놓였던 미희(김소진)의 캐릭터로 인해 더욱 부각될 수 있었다. 미희는 자신의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생각, 처지, 감정 등을 우선시하며 소녀 감 섬으로 살아가는 여성이자 엄마이다. 비교적 어릴 적 결혼과 사별을 동시에 경험한 탓에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자기 연민은 그녀가 유부남과의 불륜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성년이라면 불륜이 얼마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인지, 성숙하지 못한 관계인지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지만 미희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륜과 더 나아가 임신 알아버린 딸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로맨스에 늘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일종의 세기의 사랑 혹은 트루 러브라고 믿으며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 이 관계성이 그녀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초래할 파괴성 또한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와 같은 미희의 모습은 영주뿐만 아니라 엄마보다도 더 의젓하고 성숙한 딸의 모습과도 대조되어 나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원 역(김윤석)
또한, 복잡한 마음과는 별개로 화가 났던 부분은 극 중 영주의 남편이자 미희의 불륜남으로 나오는 대원(김윤석)의 모습이었다. 미희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미성년 2를 맡고 있는 이 캐릭터는 총체적인 난국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딸, 와이프, 불륜녀 그 누구에게 한번 솔직하지 못한 채 끝까지 비겁하고 치졸하며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아빠이자 남자였다. 자신의 와이프는 물론 가정을 등지면서까지 만났던 여성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못한 채 시종일관 회피하는 것에 여념 없었던 모습들을 보며 매우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함축적인 의미 이해에 있어서는 매우 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아! 저런 사람이 미성년 바로 그 자체이구나.'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라고 해서 다 성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명목상, 어엿한 성인으로 분류되는 나 자신은 영화가 제시하는 미성년으로부터 완전히 멀다고 말할 수 있을지, 성년에는 얼마큼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죽을 때까지 이상적이자 완전한 성년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현재의 상태에서 후퇴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태도들의 축적물이 나를 성년에 가깝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분명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최소한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인생을 살아갈 사람 또한 잘 선택하고 잘 만나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고 나는 그것을 존중해야 할 의무와 필요성이 있지만 아무리 다양해도 존중할 것이 있고 존중하지 못할 것, 존중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불륜이 그러하다. 끝도 시작도 어느 하나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한때 소중했던 사람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마는 세상 최고의 무책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많은 형태에도 불구하고 절대 용인될 수 없는 관계성. 타인의 인생을 아프게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인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꼭 당사자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흥분의 상태가 지속되기는 했다. 그러나 잔잔함 안에 내재하는 파괴성과 이로 인한 등장인물들 각각의 심리 변화를 엿볼 수 있어서 인상 깊게 봤다. 김윤석 배우님의 감독으로서 첫 영화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잘 다듬어진 영화인 것 같아서 놀랐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줬다는 점에서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