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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산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울며 함께 살아가자는 것


Jung's Saying
어떤 과거는 뒤로 가는 게 아니라
자꾸만 앞으로 오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당혹스러워하는 우리를 위해
시인 박준이 건네는 담담한 위로와 공감의 문장들
그를 통해 과거를 간직한 채 현재를 사는 방법을 배운다.     


19p.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32p. 그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나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너는 다만 슬프다고 했다.

25p. "오늘 점심은 급식이 빨리 떨어져서 밥을 먹지 못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 책으로 말하자면 남동생이 군대에서 다 읽어오더니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추천해 줬던 책이다. 쉽게 쉽게 잘 읽혔다는 동생의 말에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단순히, 마냥 쉽게 읽히는 책을 좋아하지 않으며 평소 동생과의 독서 취향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나의 오만이 부끄러웠을 정도로 솔직 담백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흔히 '시간이 해결해 준다' 혹은 '시간이 답이다'라는 소리들을 한다. 살면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들 이를테면  삶,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문제를 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이다.  이러한 위로는, 물론 누군가에게는 진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진실일 수 없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 위에 또 다른 시간들이 겹겹이 덮였을지라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진해지는 이 기억들은, 때로는 애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 있듯, 이 책은 저자 박준의 지나가버린 '어떤 기억'과 '어떤 사람들'의 부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한 편의 시처럼, 때로는 한 편의 극처럼 묘사되며 저마다의 상황과 대상에 따른 감정이 잘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막 화려함이 돋보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담백한 낌에 더 가깝다. 여기에는 저자가 시인이라는 사실이 한몫한다고 생각하는데, 대개 절제의 언어를 통해 최대의 감정을 끌어내는 '시'의 메커니즘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대신에 하나하나씩 펼쳐 보이고 있다.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 누구보다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이다. 이러한 문체는 책의 제목과도 많이 닮아있다. 이미 지나가 버렸기에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원히 지나갈 수 없는 기억들이라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딜레마 속에서 저자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쓰고 또 씀으로써, 과거를 아무리 새겨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몇 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그래서 오랫동안 두고, 보고 싶은 문체들이 간혹 있는데 그런 책을 또 만나게 된 것 같아서 기뻤다. 결코 뻔하지 않으며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산문집이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생각에 잠기고 싶거나,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반복해서 읽기를 추천한다. (새벽에 읽으면 감성 폭발해서 잠 못 자는 것은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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