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넘어서는 이기심의 순간들에 대하여
수영장에 가면 물에 들어가기 전까지 탈의실과 샤워장 등 몇 개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데, 그 사이사이 수 많은 안내문구와 마주치게 된다. 대부분 "수영모 착용", "뛰지 마시오", "샤워장 내 소변금지" 등 너무 당연한 말들이여서, 평소에는 읽는 둥 마는 둥 지나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안내문이 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어떤 분이 탈의실에서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직행하려는 찰나, "샤워를 하고 들어가야지!"라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 정도면 됐지'라는 표정으로 샤워기를 들어 온몸에 물을 휙휙 뿌리고 다시 수영장으로 입장하려고 했다. 그 때,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누칠까지 싹 하고 들어가야지!”
샤워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지며, 모두가 비누거품을 내던 손길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봤다. 지적을 받은 사람은 물로 씻었으면 된 것 아니냐며, 어디 비누로 씻으라고 적혀 있기라도 하냐고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맞은편 벽을 가리켰다. 흰 종이에 코팅까지 된 안내문 하나. 거기에는 분명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입수 전 거품샤워 필수’
이제 더 이상 개개인의 다툼이 아니었다. 한 쪽은 개인의 의견이었고, 다른 쪽은 수영장의 공식 규칙이었다. 결국 그는 "내가 못 봐서 그런거지...그렇게 무안을 주느냐"고 궁시렁거렸지만, 조용히 샤워타월을 꺼내드셨다.
수영장의 안내문은 이처럼 각자의 상식이 부딪힐 때, 그 경계를 정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즉, 벽에 붙은 수 많은 코팅된 하얀 용지는 그 동안의 말다툼과 민원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평화협정문인 셈이다.
실제로 내가 다니는 수영장에도 최근 새로운 문구 하나가 추가됐다. 공용 드라이기로 머리 외에 발가락, 그리고 은밀한 부분까지 말리던 사람에게 누군가 위생상 삼가해 달라고 말한 뒤였다. 그는 "직접 닿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며 크게 역정을 냈고, 그 다음 날부터 벽에는 새로운 문구가 붙어 있었다.
'헤어드라이기 사용 시 머리 말리는 용도 외에 다른 부위 사용 금지'
하지만 모든 행동을 이렇게 '코팅된 안내문'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못마땅하게 보이는 행동을 일일이 직접 지적하는 것도 싸움으로 번질까 두려워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 것은 수영장만의 은어다. 탈의실에서 미리 수영복을 입고 씻지 않은 채 입장하는 사람은 '탈의실 트랜스포머',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입수하는 여성은 진한 화장의 일본 공연예술을 나타내는 말에 빗대어 '가부키', 양치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입냄새 빌런', 샴푸를 하지 않아 떡진 머리카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물미역'. 직접 말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이런 은어들로 이름 붙이고, 뒤에서 몰래 흉을 보며 기분을 풀어낸다.
그런데 은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안내문이 없는 '물 속의 행동'이다. 레인끝에 붙어 쉬며 떨어지지 않는 '따개비', 턴지점을 막고 서 있는 '문지기', 느린 속도로 떠 다니는 '해파리', 잠영하다 갑자기 튀어오르는 '암초', 앞사람의 발을 계속 건드리는 '뒤꿈치 살인마' 등 그 종류도 다양해서 일일이 언급하기조차 어렵다.
이런 물 속의 규칙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기에, 처음 수영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알기 어려운 영역일 수 밖에 없다. 25미터 레인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초보자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건 당연하다. 얼마 전, 수영장 레인 끝 중간의 턴 자리를 비워두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을 몰라 지적을 받고 당황하던 사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순간에는 일일이 지적하여 텃세로 느껴지게 하거나, 뒤에서 은어로 흉보기 보다는 새로운 규칙을 익혀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학기첫날 내 자리가 어딘지 몰라 서성였던 기억, 직장 첫 출근 날 어디서 대기할 지 조차 몰라 안절부절하던 경험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문제는 규칙을 몰라서가 아니라, 본인만의 상식과 이기심을 앞세워 규칙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수영장의 '빠른 레인'에서 매우 느리게 수영하던 한 어르신에게 라이프가드가 옆의 느린 레인으로 이동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그 분은 옆의 레인으로 가면 더 느린 분이 있어서 본인의 운동이 방해받을 뿐 아니라, 잘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잘 피해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화를 냈다. 내 귀에는 그 말이 "나만 편하면 되지"라고 들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나도 현실에서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무시를 당하는 느낌이 들 때, 물 속에서라도 절대 지지 않고, 내 것을 하나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규칙보다는 내 감정과 이기심을 앞세우게 된다. 그리고 수영을 마치고, 샤워장에서 누군가에게 은어로 불리는 건 아닐지 타인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후회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내일 수영가방을 챙길 때는 '타인의 실수는 한 번쯤 눈감아주는 마음, 수영장의 규칙은 지키되 틀린 점을 들으면 고치려고 노력하는 마음'도 함께 챙기겠다고 말이다. 파랗게 아름다운 수영장 타일이 '따개비 금지'나 '해파리 퇴출'과 같은 하얀 코팅지로 가득차는 풍경은 상상조차 하기 싫으니까.
"당신의 수영장에 인상깊은 안내문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