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하여
살다보면 크고 작은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날이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괴로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건 속인 정도가 아닌 사기나 기망이어서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 차는 그런 날이 있다.
외할머니가 해주신 김치만두 하나면 입덧이 싹 가라앉을 것 같은데, 더 이상 그 만두를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서럽게 울었던 날. 오래 준비한 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내려보며 다른 지인들의 이름이 다 보이는 데, 내가 간절히 찾는 이름만 끝내 발견할 수 없어 하늘이 원망스럽던 날. 아끼고 또 아껴서 열심히 모은 돈을 어쩔 수 없이 보태고 텅 빈 잔고를 한참 들여다보며 허무해진 날.
보고서를 다섯 번 수정하거나, 남편이 아껴둔 내 간식을 전부 먹어버린 일 정도는 술이나 커피 한 잔에 털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무거운 슬픔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어렵다. 내가 입술을 떼는 순간, 나를 아끼는 이들에게 이 무거운 걱정이 옮겨질까봐. "별일없지?"라는 엄마의 안부전화에 정말 힘들다고 울음을 터트리고 싶지만, "응, 잘 지내지"라고 거짓말로 삼켜버린 눈물은 목구멍 어디쯤에서 굳어버려 말을 막는다.
그런 날이었다. 남편과 딸에게까지 이 슬픔을 나누고 싶지 않아 집 밖으로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은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는데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마치 슬픈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비참함이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정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대상도 없는 원망을 마음속으로 쏟아내며 버스정류장 차양 밑 의자에 앉아 비를 피했다.
옆에 앉아 있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아저씨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로 지팡이에 묶어둔 무언가를 풀며 팔꿈치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짜증이 올라왔다. 뭘 꺼내려는건가 싶어 쳐다보니 우산이었다. 비를 피해 가려나 보다 싶었는데, 힘겹게 펼친 우산을 내 무릎과 본인 무릎 사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리없이 울고 있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씨익 웃으며 먼 하늘을 가르키고 손가락 열개를 펼쳐 보여준다. '가만히 있어도 힘든 데 왜 자꾸 건드리는거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라리 비를 맞고 가버리자 싶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아저씨는 다시 내 어깨를 툭 치고, 시계를 가르키고, 열손가락 펼치고, 다시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먹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의 반대편 저 멀리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제서야 이해했다.
"10분만 기다려봐. 비가 그치고 푸른 하늘이 나올 거야."
내 다리로 들이치는 빗줄기는 이미 아저씨가 펴둔 우산이 묵묵히 막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 떨어지는 비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로 비가 그쳤다. 정확히 십분인지는 모르지만 그 쯤이었던 것 같다.
똑똑똑. 주륵루륵. 세상의 소음을 다 삼켜버린 빗소리를 듣고 있어서일까, 물 소리가 가득한 수영장에 가고 싶어졌다. 요동치는 내 맘과 달리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한 수영장 물이 괘씸해서 나는 물 속으로 뛰어들자마자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다. 퍽,퍽. 손바닥으로 수면을 세게 내리치며, 세상에 못한 분풀이를 쏟아냈다. 발로 물을 힘껏 차내며 내 안의 응어리진 설움들도 함께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아이고 이 년아, 그래봤자 그 물이 아프것냐. 니 손만 아프지. 그만해라." 나는 피식 웃으며 속으로 대꾸했다. '아닌데, 물도 퍼렇게 멍들었거든.' 사실은 내 손바닥과 발등만 벌개진 걸 알면서도.
한참을 물과 싸우고 나오니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화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비해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달라져있었다. 지금이 피할 수 없는 소나기라면, 그냥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보자고 마음의 결이 달라졌다. 운명을 거스르며 이겨내는 것도, 억지로 버티는 것도 아닌, 그저 어쩔 수 없지라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마음. 그러자 어느 새 설움도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수영장을 나서는 길, 이래서 사람들이 우울은 수용성이라 하는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희미한 미소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