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인어공주 비늘

취향으로 나타내는 삶의 색깔에 대하여

by 유영

수영복 위의 환한 꽃무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일명 하와이 꽃이라고 불리는 플루메리아 무늬가 가득한 수영복이었다. 이 수영복을 입으면 수영장 안에 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마치 동남아의 휴양지에 와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구매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내 취향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나는 중학생 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이 수영복 어때?”

딸의 대답은 간결했다.

“할머니 수영복 같아. 촌스러워. 사지 마.”

딸의 짧은 한마디에 머릿속에 펼쳐졌던 따듯한 열대 휴양지 이미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동네 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 시간에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구매 의욕은 조용히 식어버렸다.

조금 자신감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쨍한 색깔의 단색 수영복이었다. 골반 부분에 포인트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다시 한 번 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건 어때?”

딸의 대답은 이번에도 짧았다.

“너무 야한 느낌이야. 사지 마.”

연거푸 거절을 당한 내가 조금 불쌍해 보였는지, 딸은 검은색의 차분한 수영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예쁘네. 이거 사.”


처음 수영을 시작할 때, 나 역시 검은색 수영복을 샀다. 저렴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검은색을 입으면 튀지 않고 조용히 물 속에 섞여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직장 출근 날, 검은색 정장을 갖춰입고 나가던 그 마음처럼. 평소에도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 편이이고, 어두운 색이 날씬해 보인다는 이유도 한 몫했다.

디자인 역시 몸을 최대한 가릴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 복장으로 원피스 수영복이 활용되면서, 수영복이 여성의 몸매를 드러내는 장치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었다. 내 몸을 수영복 차림으로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기에, 그나마 가리는 면적이 제일 넓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했다. 주변에서는 한 치수 작은 수영복을 사야 물이 덜 들어오고 오래 입을 수 있다고 조언했지만, 몸의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 넉넉한 사이즈를 선택했다.


그렇게 몸을 최대한 가린 검은 수영복을 입고도, 처음 수영복을 입고 탈의실에서 수영장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조차 남들앞에서 벌거벗고 나타나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수영을 오래 한 엄마 친구분들의 화려한 수영복을 보면서, 저렇게 눈에 띄는 것을 입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숨겨둔 뱃살까지도 같이 들어날텐데 라고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수영장에서조차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수영 연차가 쌓일수록 수영복을 바라보는 기준이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얼마나 가릴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나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는지, 다리를 차기 편한지, 물속에서 저항이 없는지가 수영복을 고를때 핵심 기준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출도 조금씩 늘어났다. 등과 다리가 시원하게 파인 디자인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엉덩이를 골반 아래까지 덮어주는 로우 컷(Low Cut)만 입다가, 고관절의 움직임이 편해 발차기가 자유롭다는 이야기에 골반 뼈 위로 높게 파인 하이컷(HIgh Cut) 수영복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또 다른 기준이 생겼다. 수영복이 단순한 운동복을 넘어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수영복을 고를 때 "진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색깔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평소에 직장 생활에서는 입기 어려운 과감하고 화려한 색과 무늬의 수영복을 통해, 그동안 숨겨 두었던 또 다른 나를 드러내 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샀던 검은색 수영복은 어느새 저 멀리 밀려나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인어공주라면 어떨까. 인어공주의 꼬리에 달린 비늘 색을 내가 고를 수 있다면, 굳이 검은 비늘로 칠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왕이면 알록달록한 비늘이면 좋겠다. 우럭 같은 검은 비늘보다는, 열대어처럼 반짝이는 색깔이면 더 좋겠다. 그런 마음이 어느새 수영복에 투영된 것이다.


수영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나의 취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취업 후 처음으로 당황했던 순간은, 나의 환영식을 이유로 모시던 상사와 함께 중국집에 갔을 때였다. 먹고 싶은 메뉴를 마음대로 골라 보라는 말에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유산슬이니 라조기니 하는 낯선 이름들을 읽어내려가다 도저히 알 수 없어 평소대로 탕수육과 짜장면을 주문하자, 탕수육은 소고기가 좋은지 돼지고기가 좋은지 물어보셨다. 그 질문에 나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소고기는 아주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어서,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가지를 모두 시켜 뭐가 더 맛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해주셨고, 나는 그 날 처음으로 내 고기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여유가 생기면 나만의 고유한 취향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수영복을 고를 때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숨겨두었던 나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수영복 매장에 가면 비슷한 가격대의 색깔과 무늬만 다른 수영복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하나씩 손으로 넘겨보며 무엇이 내 눈에 들어오는지, 나랑 잘 어울리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이렇게 고른 새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 갔을 때, 함께 수영하는 사람들이 "예쁘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해주면 내 안목이 인정받은 것 같아 그날 발차기에도 한껏 힘이 들어갔다.


더욱이 어느 날 책에서 이런 선택의 자유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읽게된 후로부터 수영복을 구매하는 것이 마치 선거에 투표하는 것처럼 진지한 의식이 되었다. 1900년대 초, 호주의 수영 선수였던 아네트 켈러먼(Annette Kellerman)은 몸에 딱 붙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미국 공공 해변에 들어갔다가 ‘부적절한 노출’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해변에서 수영할 때 물에 젖으면 무겁고 불편한 드레스 형태의 옷을 입고 몸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재판과정에서 그녀는 이렇게 항변했다.

“법으로 수영하는 여성의 옷차림을 규정하는 것이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수영복을 제한하는 것이 결국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수영을 못 하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외침이었다.

그 날 이후 여성 수영복은 점차 움직이기 편하고, 개인의 신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오늘날 우리가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수영복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런 작은 도전들이 쌓온 결과인 것이다. 물론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핵실험에서 이름을 따온 ‘비키니’처럼 과감한 수영복은 아직까지 나에게 조금 부담스럽다.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실내 수영복에서의 작은 과감함 정도는 슬쩍 욕심이 난다.


언젠가 딸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수영이 좋아지면, 너도 너만의 인어공주 비늘을 고르게 될 것인데, 그 기회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도전 위에 이루어진 것이니, 충분히 고민해서 고르길 부탁한다. 그 끝에 어떤 색과 디자인을 고르든,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너의 취향에서 비롯된 선택이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이제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사실 그날 네가 반대했던 푸른색 플루메니아 수영복을 샀고, 그 수영복을 입고 수영할 때 정말 행복했다고.




"여러분은 어떤 무늬와 색의 수영복을 입고 헤엄치시는지 취향이 궁금합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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