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렁거림 뒤에 감춰진 삶의 무게에 대하여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모와 수경을 쓰려는데, 수영 가방 안이 텅 비어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제 다녀온 다른 수영장 탈의실에 두고 온 모양이다. 다행히 같은 레인 언니들이 빌려준 여분의 수모와 수경 덕분에 수영은 할 수 있었지만, 물속에서도 한동안 ‘나는 왜 이렇게 덜렁거릴까’라는 자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나의 덜렁거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큰맘 먹고 산 새 수영복을 처음 입은 날, 탈수기에 넣어 두고 깜빡하고 집에 돌아왔다가 다음 날 가 보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맘에 드는 화장품으로 가득 채운 파우치를 자랑하듯 꺼내 놓고 그대로 두고 와 다시 보지 못한 적도 있다. 수건을 챙기지 않아 자연풍으로 몸을 말리는 것은 예사고, 회원 카드를 잃어버려 카운터에서 머쓱하게 재발급받는 일은 비일비재해 이제는 당황스럽지도 않다.
자책 섞인 물살을 가르다 문득, 얼마 전 수영장에서 있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 자유수영 시간이었다. 누군가 갑자기 다급하게 “다들 눈 감으세요!”라고 외쳤다. 물속에 있던 사람들은 상황도 모른 채, 마치 시간이 멈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수건을 들고 달려나와 누군가를 급히 감싸 탈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얼음땡’이 풀린 것처럼 수영장은 원래의 움직임을 되찾았고, 수면 위로 작지만 날카로운 웅성거림이 번졌다.
“치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수영복을 안 입고 물에 들어와.”
“이제 저분은 수영장 나오기 힘들겠네.”
그날 나는 그저 놀란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잃어버린 수모와 수경 대신 타인의 장비를 쓰고 있다 보니 내 것이 아닌 허전함이 느껴져서일까, 불현듯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 할머니는 어떤 하루를 보내다 수영장에 오셨던 것일까.
어쩌면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손주를 겨우 달래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길, 한여름의 햇볕이 너무 강해 땀에 젖은 옷이 들러붙어 갑갑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옷 위에는 여러 목소리가 함께 얹혀 있어 점점 무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혼자 밥을 챙겨 먹기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남편의 전화, 손주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다며 퉁명스럽게 말하던 딸의 불만, 처가살이로 늦게까지 일하고 와도 집이 편하지 않다고 낮게 말하던 사위의 목소리.
할머니는 그저 그 옷을, 그 모든 것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몸이 가벼워지는 그 찰나의 해방감만 생각하며 수영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시원하게 물을 가르며 몇 바퀴 돌고 나와 샤워를 하고, 수영장 친구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면 다시 그 무거운 일상의 옷을 입고도 살아갈 용기가 생기니까.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으니까. 몸에 달라붙어 있던 삶의 소음들을 잠시 훌훌 벗어 던지고 자유롭게 물속으로 날아들어 갔던 것뿐인데. 수영복 입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을 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를 향한 시선도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어쩌면 나 또한 그냥 덜렁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머릿속에 너무 많은 목소리를 담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수영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오면, 다시 일상의 많은 요구가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온다. 출근해서 챙겨야 하는 업무 회의, 아직 널지 못하고 세탁기 속에 남아 있는 빨래, 퇴근 후 곧바로 준비해야 하는 아이의 저녁밥, 납부 기한이 지난 것 같은 학원비, 그리고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지인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수영용품 하나쯤은 가끔 잃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는 수영 가방이 가끔 가벼워도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목소리를 물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잠시 듣지 않고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덕분에 수영용품은 가끔 잃어버려도, 적어도 나를 잃어버리지는 않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