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해도 삶이 그대로일 때

과거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by 본연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학교를 인생에서 지워내지 않는다. 그곳은 내가 키워진 토양이므로.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 함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의 인생 여정에 있었던 모든 사람은 나의 토양이었고 집이었다. 연인과 헤어진다고 하여 인생에서 마치 없었던 듯이 살아가는 건 나 자신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사회적 통념상 굳이 꺼낼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들. 나는 굳이 전 연인을 언급하지 않으며 일기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의 기록뿐 아니라 인생에서 큰 공허함을 느꼈다. 행복을 쌓고 쌓아도 무너지는 느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 나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글쓰기를 했는데 계속 구덩이에 빠졌다. 그렇게 나의 1년은 공허한 몸부림이 되었다. 정말 이상했다. 그 이상한 녀석에게서 탈출했고, 뿌리째 뽑아 없애버렸는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 분명 깨끗해져야 하는데.


그러던 오늘 나는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그것이 좋던 나쁘던 내 과거의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일부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당연히, 명백히 존재했던 나의 역사를 애써 외면하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사실 빈 공간으로 남겨둔 이유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음 연인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쉬는 날을 맞아 오늘 나의 구멍 뚫린 일기들을 마저 채웠다. 비어있었던 나의 지난 1년의 기록. 어쨌든 나에겐 남은 감정 따윈 없으니 쉽게 써졌다. 사진까지 다 삭제해 버린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쉬운 일이 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


일기를 다 채우고 나니, 드디어 구멍 뚫린 나 자신이 결핍 없이 풍족하게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연인에 대한 배려는 다 하면서,

왜 그동안 나 자신은 배려하지 않았는가?

인정과 수용. 그저 받아들임이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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