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밍 Oct 18. 2018

3평 방 안에 그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북창동 고시원에서의 한 달

북창동 고시원에서는 한 달을 살았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인사담당자는 금요일 오후에 합격 소식을 알려주면서 이틀 뒤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분명 다른 기관인데, 2년 전 인턴 때와 데자뷰 처럼 같은 상황이었다. 그때도 나는 이틀 만에 트렁크 하나만 꾸려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 집으로 가야 했다.


1년간의 인턴기간이 끝난 뒤, 그리고 또다시 1년간의 탄자니아 파견 생활이 끝난 뒤, 그러니까 인턴과 자원봉사자(라 쓰고 계약직 직원이라 읽는) 신분으로 직원인 듯 직원 아닌 직원같이 2년간 일을 한 뒤, 나는 부산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정규직으로 일을 좀 해야겠다 싶었다. 부산 집에서 머물며 구직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태엽인형처럼 다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시절부터 무려 7년간 해온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감을 느꼈다. '공주'를 만드려고 시작한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의 엔딩이 언제나 공주는 아니었듯이. 용돈벌이로 집안일이나 아이 돌보기 같은 일을 시켰더니 엔딩에서 보모가 되어버린 게임 주인공처럼, 돈 벌려고 시작한 과외가 나의 엔딩이 되어버리면 어쩌지, 하면서.


다행히 그 불안은 길지 않아 끝났다. '배워서 남주는' 재주 덕분에 한두 달 치 고시원비와 생활비 정도는 모을 수 있었다. 얼마 뒤 나는 또 한 번 전화를 받게 되었고, 지난번과 똑같이 이틀 후 출근을 통보받았다. 이번엔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인터넷에서 시청역 근처의 고시원을 검색했고 적당한 곳을 골라 예약금을 보냈다. 그리고 똑같은 캐리어에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신속하고도 여유로운 조치였다. 짐은 단촐했다. 또 인턴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의 인턴 기간 후 정직 전환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고시원비가 55만 원인데 인턴 월급은 또 110만 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직 전환의 가능성이 있다니까.


고시원에 처음 온 날, 그러니까 서울역에서 곧장 북창동으로 온 날엔 비가 내렸다. 시청역에서 비를 맞으며 덜덜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10분을 걸었다. 당시 서울에 살고있었던 남자 친구는 선약이 있어 마중을 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래. 부산에서 서울 오는 게 뭐라고. 난 그런 걸로 삐지지 않는 여자다. 난 스물여덟이나 먹었고 고시원비도 생활비도 내가 벌어 쓰는 성인이다. 어쩌면 이거야 말로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독립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빗길을 걸었다.


시청 근처에는 고시원이 많았다. 아침이면 콩나물 불고기집 2층에서, 백반집 3층에서 정장을 빼입은 직장인들이 비밀요원처럼 하나둘씩 빠져나왔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55만 원짜리 3평방에 모셔둔, 3개월 할부로 산 30만 원짜리 탠디 구두를 꺼내신고 2층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55만 원짜리 방을 얻기 전엔 바로 옆 건물의 50만 원짜리 방에 있었다. 거기에서는 1주일을 못 버텼다. 천장은 위층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웅웅 거리며 신음을 냈고, 나무로 된 방문은 발로 한번 뻥 차면 맥없이 낯선 이에게 길을 터줄 것 같았다. 변변한 자물쇠나 잠금장치 하나 없이 똑딱, 하고 누르면 잠기는 둥근 손잡이가 전부였다. 오른쪽 방에서는 목이 쉰 경상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왼쪽 방에서는 야구 중계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주방에는 밥과 김치가 있었지만 곱등이도 있었다. 항상 같은 시간에 라면을 끓이고 있는, 야위고 말이 어눌한 사십 대 아저씨도 있었다.


그 날, 눅눅한 방바닥에 비 맞은 캐리어를 내려놓고 늦은 저녁으로 우동을 먹고 있을 때, 남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앞에 와있어. 늦게라도 봐야 할 것 같아서."
"나 이제 우동 먹기 시작했어. 다 먹고 나갈 거야. 좀 기다려."
야구중계와 경상도 남자의 말소리 사이, 3평 방안에 그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샐쭉한 표정으로 그 목소리를 노려봤다. 우동은 아직도 반 이상이 남아있다. 흥. 넌 좀 기다려 봐야 해. 한번 당해봐라. 최대한 늦게 나가고 말겠어. 나는 면발을 한 젓가락 가득 집어 몇 번 우물거리다 목구멍으로 넘겼다. 흥. 넌 좀 기다려 봐야 해. 난 최선을 다해 천천히 먹을 거야. 창문 없는 방 안에서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는 동안, 머릿속엔 비가 그쳤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절반의 독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