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밍 Oct 17. 2018

절반의 독립

‘취뽀했다’는 기쁨보다는 ‘어디서 살지’하는 걱정이 앞섰다.

서울에 있는 한 회사로부터 생애 첫 합격 통지를 받은 날, ‘취뽀했다’는 기쁨보다는 ‘어디서 살지’하는 걱정이 앞섰다. 인사담당자는 금요일 오후에 합격 소식을 알려주면서 이틀 뒤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주소지가 부산이던데… 출근 가능하시죠?” 라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출근일을 미룰 수도 있냐고 물었더니 그럴 수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대체 왜 물어본 건지. 뭐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나는 스물여섯이었고, 집에서 놀고 있는 나를 인턴으로라도 써 준다는데. 서울로 얼른 달려가야 했다.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것이었다. 부산 토박이인 어머니는 서울과 경기, 인천에 사는 초·중·고등학교 동창, 친척, 사돈댁, 아버지 친구까지, ‘중부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잡듯이 골라냈다. 추려보니 서너 명 남짓되는 후보군이 나왔다. 평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어머니가, 아웃바운드 상담원처럼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응, 애숙아. 내다, 현숙이. 별일 없제? 어야, 내가 염치 불구하고 본론부터 말하꾸마. 우리 둘째가 서울에 취직이 됐는데, 너네 집에 신세 좀 질 수 있겠나?”
그렇게 전화를 건 지 몇 번째 만에, 아버지의 초등학교 ‘여사친’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남편과는 사별한 지 오래됐고 외동딸은 결혼해서 나갔으니, 남는 방을 쓰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이틀 만에 트렁크 가방 하나만 꾸려 집을 떠났다.


아버지 친구, ‘이모’ 집에서는 석 달을 살았다. 조국독립만큼이나 간절히 독립을 원한 시간이었다. 손빨래하려고 숨겨둔 내 팬티를 빨래대에 널고 있는 ‘이모’와 눈이 마주치거나, 결혼한 외동딸이 친정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배가 살살 아파왔다. 오늘의 운세를 보듯 매일 아침저녁으로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 카페를 뒤졌고, 주말이면 스크랩해둔 집들을 보러 다니며 서울구경을 했다.


여름의 초입, 공기는 축축하고 아스팔트는 뜨거웠다. 집에서 보증금을 마련해 준다 해도 월세는 내 몫이었다. 그 보증금에 그 월세를 받는 집들은 대개 대로변에서 멀었고, 좁은 골목 안 이었고, 지면에서 매우 높거나 되려 매우 낮았다. 서울 집값에 감이 없었던 나는 보증금 500짜리 집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화를 걸었다(당시 부산의 대학교 주변 원룸은 보증금 500에 월세 30이면 충분했다). 회사는 숙대 앞 청파동에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내가 보러 갈 수 있는 집들은 갈월동이나 남영동에 몰려있었다.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스물여섯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실내에 화장실이나 부엌이 없는 집들을 보게 되었다. 빈집이지만 전 세입자의 생활을 짐작케 하는 방 - 벽지에 밴 담배냄새와 장판의 담배구멍, 곳곳에 물이 샌 흔적 - 안에서, 나의 나이브한 세계가 뒤틀리고 있었다. 한 번은 건너편 집 문 앞에 일렬로 세워진 몇십 개의 소주병과 270 사이즈의 '삼선 슬리퍼'를 보고, 본 적도 없는 잠재적 이웃의 얼굴을 무의식 중에 떠올리기도 했다. 나는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 언덕 집에서 뛰어내려 갔다.


 "반지하든 옥탑방이든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라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정말 그랬다간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을 거다. 부모의 품 안에서 잘난척하던 스물여섯이 부모의 도움을 받고도 서울에서 마련할 수 있는 집이란 그런 것들뿐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었는데, 그 돈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싶었다. 당시만 해도 고시원에 살 자신은 없었고 - 하지만 후에 짧게나마 고시원에서 살게 된다 -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미안했다. 부모님이 천만 원 정도는 어떻게든 마련해본다는 말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엄마손에 붙들려 치과 가는 어린애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발 뒤꿈치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천에 사십만 원짜리 원룸을 얻어 '이모집'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인턴 월급이 110만 원이었으니까 월세와 공과금이 정확히 그의 절반을 가져갔다. 조금 오래되었지만, 마음씨 좋아 뵈는 노부부가 주인인,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나오긴 했지만, 숙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빨간 벽돌집이었다. 적갈색 싱크대 수납장과 옥색 화장실 문, 갈색 알루미늄 '샷시'는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미니멀한 취향' 따위는 '버건디'색 찬장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샤워 후에 발가벗고 나와 바디로션을 바를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욕실 바닥에 후두둑 떨어뜨린 채로 출근하고, 밤 열두 시에도 내 맘대로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것도 마낭 좋기만 했다. 절반의 독립이긴 했지만, 나는 비로소 반쯤은 혼자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