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서사가 궁금해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이야기는 흐르고 나는 당신의 역사를 유영한다. 개인이 지나온 시간들, 층층이 쌓아 올려진 삶의 서사를 한 겹씩 들여다본다. 나는 당신의 내력에 대해 묻는다. 지금 내 앞에 앉은 당신이 거쳐온 삶의 방점들에 대해 듣는다. 조심스럽게 그 점들을 이어 선으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혹은 거꾸로, 선으로 완성된 현재의 당신을 있게 한 점들을 추적해나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a와 b를 거쳐 c에 이르렀고, d와 e와 f와 g를 이었더니, 나는 지금, 오늘의 당신을 여기서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군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진다. 데이트 약속을 정한 뒤에는 그 날이 다가올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뭘 입지? 뭘 먹지? 하고 고민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조금 더 신나기 시작한다. 나는 사전 인터뷰로 본 방송용 대본을 쓰는 방송작가처럼 다가올 날의 대화 흐름을 구상해본다. 어떤 질문을 할까? 어떻게 질문해야 좀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현장조사에서 지역주민에게 물어볼 질문지를 만들 때처럼 신중해진다. 일할 때나 일상생활에서나, 내가 고민하지 않고 질문할수록 인터뷰이는 대답하기가 어렵다. 내가 얕은 질문을 하면 얕은 답변이 돌아온다. 어떻게 하게 된 데이트인데, 껍질만 핥다가 끝나는 대화를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반에 너무 무거운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는 건 위험부담이 있다.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 본다. 필요하다면 sns를 살펴보기도 한다. 그가 관심 있어할 만한 주제들을 준비한다. '취미가 뭐예요?'라고 묻기보다는, 그가 스치듯 얘기했던 걸 기억해 '전에 자전거 타러 한강에 가신다고 했죠? 자전거는 언제부터 타기 시작하셨어요?'라고 물어볼 것이다. 왜 자전거를 타는 게 좋은지, 처음 자전거를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군지, 세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로 넘어간 건 몇 살이었는지, 처음 산 자전거는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하다.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 나는 당신의 이십 대에 대해 물어볼 것이다. 지금의 당신을 있게 한, 당신이 살아온 이십 대가 궁금하다. 아르바이트를 해봤는지, 했다면 어떤 일들이었는지, 전공은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공부는 재밌었는지, 지금 하는 일은 왜,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당신의 이십 대에서 중요한 건 무엇이었는지, 10대 때와 20대 때의 당신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30대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 지금이 좋은지. 당신의 북극성은 무엇이었는지, 당신이 지나온 터널은 무엇이었는지, 내겐 그런 것이 중요하다. 궁금한 건 너무 많지만 당일날 분위기를 봐서 적당한 것만 골라서 물어보기로 다짐한다.
언젠가 매력은 '고유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개인은 그 자체로 유일한 존재이지만, 특별히 그 사람만이 가진 '유니크함'이 있을 때 멋지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고유성은 외형적인 것들 - 외모, 목소리, 패션 - 일 수도,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물론 이것들은 떨어져서 존재한다기보다는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생각이나 삶의 모습이 외형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내 경우에 누군가에게 관심이 갈 때는 그가 가진 삶의 서사가 풍부할 때였다. 스케일이 큰 대하소설이어야 한다거나 '산전수전' 다 겪은 굴곡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작더라도 납작하고 평평한 것보다는 잘 구워진 페스츄리처럼 여러 겹의 층위가 입체적으로 살아있을 때 좀 더 흥미가 생겼다. 그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계의 폭과 깊이를 통해 그의 세계를 가늠해본다. 당신의 세계가 벽돌로 쌓아 올려진 것인지, 흙으로 다져진 것인지, 혹은 몇 개의 나무 기둥과 천막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당신의 세계 안에 내가 포함될 수 있을지를 상상하면 설렌다. 당신이라는 세계를 두팔 벌려 감싸안는 상상을 해본다. 한 사람의 세계와 역사가 줄줄이 내게로 오는 걸 그려본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껴안는 것처럼, 내 양 손이 서로 닿을지 그렇지 않을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다이버가 된 마음으로 당신과의 데이트를 준비한다. 지난번엔 이 포인트에서 몇 분 동안 수심 몇 미터까지 내려가 봤으니까, 이번엔 비슷한 포인트에서 좀 더 오랫동안, 좀 더 깊이 내려가 봐야지. 그렇게 나는 당신에 대한 새로운 질문 목록을 작성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고래상어를 만난 날처럼 들떠 있을지, 혹은 미역만 보다 온 날처럼 풀 죽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러 가기 전, 질문 목록을 작성하는 지금은 신난다. 그것으로도 아직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