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해야 사람 아닌가
누군가가 미워지면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낮게 읊조린다. 아, 인류애를 잃을 것 같아. 나의 인류애는 간장 종지에 담겨 있어 걸핏하면 바닥을 보인다. '이해할 수 없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일에도 마음의 에너지가 든다. 다양하게 지랄 맞은 사람들을 겪는 일이 힘에 부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 우린 고작해야 사람 아닌가'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 같아서, 들끓던 분노나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실망감을 잠재워준다. 상대의 잘잘못을 치밀하게 지적하고 있던 내 안의 폭주하는 포청천을 멈추어준다. 대척점에 서있던 '너'가 나와 같은 분류로 묶여 '우리'가 된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혼잣말을 한다.
'그래 봤자 인간이기에 당신은 그렇게 저열하고, 그래 봤자 인간이기에 나는 이렇게 자비와 관용이 부족하겠지.'
어쩌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신뢰와 공감에 기반한 '이해'가 아니라,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코 알 수 없다는 항복 같은 것. 우리는 사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있으니, 그런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사랑하고 미워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 아닌가. 내가 무슨 잣대로 상대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본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실망을 통해 관용을 배운다. 아아, 악하고 약한 사람들, 우리들.
하지만 나는 인간이 크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다. 관용의 탈을 쓴 실망이 아니라,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 품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의지의 접속사를 쓰지 않고도 그 '누군가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 어떤 별로인 사람들을 보아도 '아유, 이 사람들 참'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절망하지 않고 누군가들을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 간장종지에 맞추기 위해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내 간장종지를 키우고 싶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나는 고작해야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겐 환대,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 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 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 이기호, <한정희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