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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Oct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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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출장이 끝났다

스스로를 ‘나일롱 신자’라 표현하지만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는 언제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부디 이번 여정도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나와 함께하는 누구도 다치치 않고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그건 절대자인 당신만이 주관할 수 있는 일이라 믿는다고.

3주간의 우간다 출장이 끝나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같은 언어,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이 다수인 곳, 내 나라 내 집, 모든 것이 빠르고 쾌적한 곳. 인천공항에 내리면 안도감에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어딜 가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소수자의 입장이었는데, 두 개의 언어를 거쳐야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공항 리무진을 타고 돌아오는 길, 창 밖의 풍경들이 낯설다.

모금 방송 촬영을 지원한 건 6년 만의 일이다. 탄자니아에 있을 때 이번과 같은 방송사가 촬영하러 온 적이 있었다. 스물일곱, 직장생활 1년 3개월, 파견 3개월 차. 그때의 나는 일정이 끝나면 혼자 훌쩍거리며 매일 밤 울었다. 영어사전이 설명하는 'shoot'의 뜻은 촬영하다, 질문을 퍼붓다, 그리고 총을 쏘다 였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주카포를 겨누는 군인처럼 보였다. 준비 없이 촬영팀을 받았고 현장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통역을 하거나 식당을 예약하다가 상황이 끝나고 나면 앗차,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는 낯선 외국인들과 카메라 앞에서 흙탕물을 마시거나 땡볕에서 물동이를 지고 같은 길을 십 수번을 걸었다.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고 있던 갓난아이와 그의 어머니는 종일 촬영 대기를 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걸어서 한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 나는 NGO 활동가가 될 자격이 없구나. 도움은 못 되어도 'DO NO HARM'이라는 원칙만은 지키고 싶었는데. 내가 이들의 삶에 해를 끼쳤구나. 수전 손택을 읽으면 무엇하나. 나는 편집되지 않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했고 '고통의 스펙터클화'에 일조했는데. 그때의 경험은 내게 두고두고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복직하자마자 촬영 지원을 위한 출장을 가라는 얘기를 듣고(정확히는 랜덤으로 차출되어), 전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모금방송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며 흙바닥을 구르는 모래 먼지 덩어리 같은 것이지만, 그 공이 지나간 자리에 홈이 파이거나 부스러기가 남아서는 안됐다. 나이도 먹고 짬도 찼으니 이제 내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시점이었다. 나는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출장을 준비했다. 여차하면 이 구역의 또라이가 되겠다는 심산이었다. 방송국 놈들, 마케팅 놈들, 걸리기만 해 봐라.

결과는 머쓱하게도 다정하고 평화로운 단체사진, 그리고 서울에서의 뒤풀이 약속이다. 6년 새 나만 달라진 게 아니라 방송 환경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물론 내가 일하는 기관도, 함께 하는 사람들도 이전과는 달랐다. 차일드펀드 우간다 내셔널 스텝들이 한국인 직원이 놓치는 부분을 세세하게 신경 써주었고, 피디님들도 우리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다(솔직히 놀랄 정도였다). 물론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조율한 마케팅팀 담당자의 노력도 빛났다. 방송이 어떻게 나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물론 자극적이고 참혹하게 그려질 수도 있다), 적어도 촬영 현장은 비정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았다. 방송의 목적과 과정에 대해 (여전히 불충분하다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촬영 전과 후로 아이의 기분을 묻고 격려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촬영하지 않았다. 재연은 있을지라도 연기나 설정은 없었다. 아이가 힘들어하면 촬영을 잠시 쉬었다. 필요 없는 장면은 찍지 않았다(이건 전적으로 피디님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아쉬움은 있다. 어린이재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아동'에 대해 무지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현장에서 가장 쉽게 무시되고 간과될 수 있는 존재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순수함을 귀여워하다가도, 아이가 아이라서 아이처럼 행동하면 답답해한다. 어떨 때는 과보호했다가, 어떨 때는 무심하게 대한다. 영화 <우리들>과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은 '아역배우를 위한 촬영 수칙'을 만들어 전 스텝이 함께 공유하고 촬영을 진행했다. 윤 감독은 어른들 뿐인 촬영 현장에서 아역 배우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 조차 꺼내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했다. 아동이면서도 배우인 이들 역시, 어떤 때는 성인과 같은 책임감이나 직업 능력을 요구받으면서, 또 어떤 때는 귀엽고 천진한 아동이라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을지 모른다. 하물며 비 연기자인 동시에 외국인에 둘러싸여 촬영을 해야 하는 사례 아동들이 겪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사려 깊은 내셔널 스텝들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아이들을 그저 렌즈 앞의 피사체라고만 생각하고 훌륭하게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완수해주기만 바랬을 것이다.


촬영팀에게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던 아이들을 떠올린다. 덤덤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던 (절대 우리가 시킨 것이 아니다) 눈빛을 기억한다. 조금 삐졌다가도 금세 배시시 웃던 미소를 생각한다. 책상에 앉아 전략이니 효과성이니 효율성이니 하는 말만 반복하다,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붙이고, 잿물로 설거지를 하고, 30분을 걸어 물을 긷고, 맨발로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보고 오니, 이 직업이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잘 살어 얌마. 무중구(하얀 사람, 외국인을 뜻하는 말)들이 떼로 몰려가서 귀찮게 해서 미안했어. 넌 잘 클 거야. 아마 너랑 나랑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나는 내가 있던 곳, 모든 것이 빠르고 편안하고 안전하고 위생적인 곳으로 돌아가지만, 아마 곧 너를 잊고 숫자와 보고서 속에서 일하겠지만.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랜드크루저 안에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갓 블레스 유. 신이 너의 앞날을 축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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