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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Sep 02. 2018

한국을 떠나 산다는 것

“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예나.”

“그게 어디 있어?”


베를린에서 다음 목적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나도 잘 모르는 곳을 설명하려니 그때마다 난감했다. 하지만 독일 중부에 위치한 예나Jena라는 예쁜 이름의 작은 도시에는 선배 부부가 살고 있어서 독일에서 꼭 들를 곳 중 하나였다. 베를린에서 세 시간이면 도착해야 했는데 버스는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배에게 너무나 미안했지만, 선배는 늦은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너무나 반갑게 날 맞아 주었다.

선배 부부가 독일에서 거주한 지는 5년째다. 독일로 가기 전에 보고 못 봤으니 정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독일에서, 그것도 선배들이 아니었으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곳에서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선배는 그 귀한 제육볶음과 따뜻한 흰밥을 내왔고, 나는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마침 마을 축제 중인 예나에서 반 맥주 전문가가 된 선배가 추천하는 맥주를 마시며 동네를 구경했다. 이곳은 옛 동독 지역이라고 했다.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 지금껏 봤던 함부르크, 베를린(반은 동독이었지만) 그리고 앞으로 갈 슈투트가르트와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뭔가 더 회색빛이 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고, 독일 프렌치프라이 대회에서 우승한 감자튀김 가게도 있는 곳이었다. 선배의 집에서 사흘을 머무르며,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주시는 선배 부부 덕택에 그 귀한 자장면과 치킨도 먹고, 매일 밤을 음주와 수다로 보냈다. 

각자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았던 만큼 서로 공감하는 점도 많았다. 특히 남의 나라에 사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닐 외국어라는 장벽에 대해 이야기할 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다시 한번 말해 줄래?”

 “아니, 나 재방송 안 할 거야. 니가 알아서 해.”

싱가포르에 살던 초반, 회사 매니저가 내게 한 말이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 살면서 영어를 못하는 건 내 잘못이었지만 정말 자존심 상하고 울화통 터지는 일이었다. 선배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초반에는 독일어 때문에 엄청 애를 먹고, 수업 시간에 화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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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공부도 그렇지만 병원에 갈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때는 더 난감했다. 한 번은 병원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단어를 계속 들었던 적이 있었다. 목이 부어 너무 아파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인데, 그 아픔보다 답답함이 더 컸다. 결국 나는 의사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는 친절하게 포털 사이트 사전 창에 단어를 입력했고, 휴대폰 화면에는 ‘Tonsillitis’라는 단어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내가 편도선염에 걸렸다는 것과 편도선염이 영어로 Tonsillitis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누가 ‘편도선염’이란 영어단어를 외우겠는가?)

“아프다는 느낌도 다르잖아요. 쑤신다, 결린다, 따갑다 등등. 전 이런 걸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각자 언어 때문에 고생하고 무시당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앞에 있던 맥주를 금세 비웠다. ‘한 번이라도 영어나 독일어를 잘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듯, 타국에 사는 누구나 언어가 주는 긴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나 보다. 


어떤 지인은 스쿠버다이빙 강사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물속에서 숨 막혀 죽을 뻔한 적이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외국에서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지 말라며 반농담을 했다. 그렇게 영어를 쓸 때 자동으로 생기는 긴장감은 알아들을 것도 못 알아듣게 만들곤 했다. 사람들은 가끔 SNS에 올라오는 외국 생활을 접하고서 부러움을 표시한다. 하지만 말하기 전에 두세 번 더 생각해야 하는 건 참 피곤하다. 외국인과 말싸움이라도 해야 할 땐 혹시 영어를 제대로 못해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어 두 배로 속상하다. 

독일의 늦은 밤, 타향살이의 피곤함을 말하는 우리 앞으로 빈 맥주병이 더 늘어 갔다.

“사실 전 외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기만 하는 방관자인 것 같아서 미안해요. 세월호나 메르스 같은 일요. 한국에 있는 사람들만 고통받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경조사를 못 챙길 때도 그렇고요.”


쓸데없는 결혼식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지만, 그와 더불어 친한 사람들의 경조사까지도 챙기지 못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인터넷으로만 접한다는 것에서도 소외감을 느꼈다. 투표권이 생긴 후 한 번도 투표를 빼먹은 적이 없던 나는 외국에 있다는 이유로 지방선거에 투표할 권리가 없었다. 그 당연함이 씁쓸했다. 이렇게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그들에게서 점점 잊혀 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울했다. 


“그건 한국을 나와 사는 사람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몫인 것 같아. 그냥 안고 가는 거지.”


나의 징징거림에 선배는 어른스럽게 답했다. 편한 사회에서 스스로 벗어나 사는 것. 물론 한국에 있을 때도 주류는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철저히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서 누리는 자유와 다양한 문화 경험은 분명 장점이다. 반면에 아무리 해도 그들과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외로움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소외감, 그리고 언제나 한국음식을 그리워해야 된다는 건 단점이었다.


함부르크에서 봤던 나달 아저씨는 30년 동안 독일에서 사셨다. 그렇지만 아직도 독일이 낯설 때가 있다고 했다. 고국인 시리아에 살았던 날보다 독일에서 산 날이 더 긴 아저씨. 독일 여성과 결혼을(그리고 이혼도...) 하고, 독일 시민권도 갖고 있는 아저씨가 여전히 외로울 때가 있다니... 어찌 보면 외로움은 평생 안고 살아야 할 건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어느 것도 100퍼센트 좋고, 100퍼센트 나쁜 게 없듯이 외국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맥주잔을 부딪쳤다.


* 제 책 <내 뜻대로 살아볼 용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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