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싱가포르를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아마 비행기를 환승하는 일 빼고 과연 내 생애 다시 싱가포르에 올 일이 있을까.
"딱 싱가포르에서 2년만 살아보자. 나도 외국에서 좀 살아보자."
처음 내가 다짐했던 2년은 어느새 8년이 되었다. 사이좋은 부부도 권태기를 겪을 수 있듯이 이 생활에 권태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지겨워. 더워. 짜증 나. 뭐 이런 그지 같은 것들이 다 있냐.'
인간이 가장 크게 성장할 때
1. 사는 곳을 바꿀 때
2. 만나는 사람을 바꿀 때 > 이게 정말 힘들기 때문에 책으로 대체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본 글
불평도 많이 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싱가포르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의 그 어떤 시기와 비교해 봤을 때 가장 많이 나를 성장시킨 시간이었다. 한창 유행하던 필리핀 영어연수 3개월은커녕 여권도 없었고 해외여행한 적도 없던 찐 촌년인 내가 이렇게 외국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싱가포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다. (여기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말처럼 외국인이 살기에 싱가포르는 참 좋고 편한 곳이란 것에 동의한다.)
"나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어."
20대의 어느 날,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싱가포르의 야경 사진 한 장에 말 그대로 뻑이 갔다.
'이왕 해외에 한 번도 안 나가본 거 아예 거기서 살아보는 경험을 하는 게 어떨까. 이왕이면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는 거지.'
그 당시에는 한국을 떠나는 것도, 회사를 떠나는 것도, 가족, 친구, 연인을 떠나는 것도 너무 크고 힘든 일이었다. 지금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살던 나라를 떠나는 일이 그렇게 힘들 줄이야.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런 결정을 했던 건 꽤 잘 한 선택이었다. 좀 웃기지만 그 당시 해외에 나가겠다는 나를 말리던 사람들 중 몇몇 사람들이 했던 말은 '넌 나이가 많잖아.'였다. 그런 말을 계속 듣다 보니 나이에 대한 부담도 들기 시작했는데(당시 나는 스물일곱) 싱가포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깨달았다. 진짜+정말+완전+다+1도 쓸데없는 말이었다는 걸.
역시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순간은 지금이다.'라는 말은 진리.
드디어 떴다, 이 바닥!
'내가 공항에서 환승을 잘할 수 있을까? 아 그런데 비행기가 사고 나면 어떡하지?'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가 떨어질까 봐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은 비행기를 탔고, 거의 스물다섯 개 나라의 100개에 가까운 도시들을 돌아다녀 본 사람이 되었다. 싱가포르의 (한국보다는) 유연한 휴가나 문화, 그리고 해외에 가기 쉬운 위치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게다가 야근도 많이 없어 혼자 이런 저런 일을 꾸미기도 좋았다. :)
하지만 싱가포르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4년 차가 되어갈 때쯤 싱가포르에서 정말 그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맞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돈 외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는 곳에 산다는 게 무료했다.
더 이상 이 나라는 나에게 어떤 영감도 주지 않았다.
'내가 정말 지구에 살고 있는 게 맞나?' - 너무 안전하고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라서 이런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외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꿈같기도 하고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나만 너무 편하고 좋은데 사는 것 같아서 외계인으로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같기도 했다.
어쨌든 쉽게 떠나지는 못했다. 여전히 싱가포르가 편한 데다 먹고사는 터전을 다시 떠나는 것에는 용기도 타이밍도 계획도 필요하니까. 그렇게 권태와 권태에서의 회복,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지나다 보니 어느덧 8년이 훌쩍 넘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날 키워줘서 너무 고맙다, 이 자식!! ^^"
떠나기 며칠 전 싱가포르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트탑 바에 갔다. 이 빌딩 숲에서 일하고 놀며, 아마 몇 천, 몇 만 번을 본 야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제사상에 정종을 올리는 마음으로 그동안 나를 보듬어준 이 도시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날 키워줘서 너무 고맙다, 이 자식!! ^^"
이건 저도 그냥 한 번 써 먹어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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