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의 삶은 내 인생을 정말 많이 바꾸어 놓았다. 만나는 사람은 물론 내 시야를 드넓히기에 충분했다.
“언니는 싱가포르에서 정말 뽕을 뽑고 가네요.”
내가 싱가포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아는 동생이 내게 한 말이었다. 맞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9년 넘게 살며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애초의 계획이었던 해외취업은 말할 것도 없다. 첫 회사에서 몇 년을 일한 뒤 귀국하겠다는 계획은 이직으로 미루어졌다. 당시에는 이직이 피곤하고 괴로웠으나 덕분에 영문이력서 면접 취업 등의 전문가? 가 되고 있으니 정말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
싱가포르에서 지내면서 인터넷에 글을 쓰고, 그 글 덕분에 책도 내고,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라면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브랜딩의 기초를 만들며 직장 없이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준.. 그야말로 싱가포르는 내게 회사 그 이상의 것을 준 것이다. 역시나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 X2
하지만 그 외에 싱가포르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역시나 남자다. (네, 저는 연애를 아주 좋아하던 신체 건강한 미혼여성이었어요.) 싱가포르에서 만나게 된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나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국제결혼을 했다.
‘오래 살 곳은 아니야. 언제든 떠난다, 한국으로.’
해외에서 몇 년간 살면서도 이민이니 영주권이니 여전히 관심이 없다. 나는 아직도 교포, 동포, 이민이란 단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수틀리면() 바로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기에 짐도 많이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 남편의 나라, 프랑스에 결혼이민을 와 있다.
“제 커리어의 전환점이 됐어요!”
“더 넓고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게 됐어요!”
해외취업의 결과로 이런 것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해외취업의 가장 큰 결과는 결혼이 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게 좀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일과 직업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가족, 내가 평생 같이 살 사람보다 중요하겠는가? 진짜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 X3
프랑스 카페의 테라스. 먹고 마시는 거 좋아하는 저는 금세 사랑에 빠졌어요.
아무튼 우리는 싱가포르에 계속 살 건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곧 아기를 가질 생각도 있었고, 남편이나 나나 싱가포르에서 몇 년씩 살아온 사람들이라 각자가 싱가포르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었다. 역시나 우리의 생각은 비슷했다.
1) 싱글이나 커플이 살기는 좋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복지가 좋은가? 게다가 우리는 외국인인데? -> but, 싱가포르는 소득세가 적은 대신 복지도 적다. 적고 주고 적게 먹는다고 보면 되긴 하다.
2) 영어를 쓰는 환경인 건 좋지만 이곳의 과도한 교육열은?
->싱가포르도 한국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사교육이 심하다. 내 아이를 학원 뺑뺑이 돌리고 싶게 하지 않았다.
3)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고 그 루트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 건?
-> 이런 면이 한국과 꽤 비슷하지만 그래도 싱가포르가 사람들의 다양성이 더 많이 존중받는 편인 것 같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더 자유롭다고 느꼈으니.
4) 비즈니스나 글로벌한 환경은 좋지만, 문화, 사회, 정치 같은 면에서 다양하지 않은 건? 사람들이 돈 얘기만 하는 건? (돈 얘기만 하는 건 정말 한국과 비슷)
-> 거의 일당독재 국가. 여기선 정치적인 이야기를 못한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못하는 건 사실 크게 상관없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사람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이 검열이 내가 하는 말, 행동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에 창의성과 개성이 충분히 자라도록 만들 수 있는 환경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개인이 타국에서 어느 정도 자라며 자신만의 가치관과 개성이 만들어진 다음에 싱가포르에 가는 거면 몰라도 아이가 어릴 때부터 스스로 검열하며 살게 하고 싶진 않다. 싱가포르의 별명: 잘 사는 북한
5) 사계절이 있는 곳에서 아기를 키우고 싶다.
이렇게 적고 나니 싱가포르를 욕하는 것 같지만, 절대절대 아니다. 싱가포르는 정말 안전하고 살기 편한 곳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어떻게 내가 거의 10년 동안 지낼 수 있었겠나? 여기서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아마 프랑스라는 비교적 좋은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도 떠나는 데 한몫했을 거다. 게다가 프랑스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남편도 본사로 발령받을 수 있었으니...
집 근처의 공원. 가끔 아이를 여기에 풀어놓습니다.
아무튼 나는 지금 프랑스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진짜 사람 인생 한 치 앞을 모른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X4
나는 나이 먹고 나서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으며 사는 게 꿈이었다. 싱가포르로 가는 것으로 내 꿈을 이루었는데, 이런 식으로 그 꿈이 지속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주변의 새로운 것들에 자극을 받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감사하다. 이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받으면서 그렇게 지낸다. 이들의 문화, 유적 등을 보면서 한껏 감탄도 하고, 이 정도는 되야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를 돌아다니면서 쌩양아치 짓(식민지 만들기)도 할 수 있구나를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앞으로는 일과 관련된 것 외에도 프랑스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해 보려 합니다.
p.s. 혹시나 노파심에... 제가 싱가포르에 대해서 내린 결론은 순전히 저희만의 의견입니다. 아기를 낳고 잘 사는 사람들도 정말 정말 많기 때문에 이건 개인적인 의견으로만 받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