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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May 12. 2016

사라예보에서 마주한 역사, 그리고 꽃 같은 사람들

아름다운 사라예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내게 어두운 색 옷만 입혔어. 밝은 옷은 저격수들 눈에 띄기 쉬우니까… 지하실에 살 때, 하루는 너무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지하실 입구로 걸어갔지. 문을 열기 바로 전에 문 밖에서 폭탄이 터졌어. 나중에 보니 내 친구들 몇 명이 죽었더라고..”


 제라드는 서른 살.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며 철없이 뛰놀던 시절, 그 아이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인해 완벽히 포위된 사라예보에 숨어 살았다. 채 10살도 안 된, 예쁜 옷만 입어도 모자란 시절에 늘 칙칙한 색의 옷만 입고, 전쟁이라는 가장 끔찍한 일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물이나 빵을 배급받기 위해 사람들이 서 있는 줄. 어디선가 나타난 저격수들이 그 줄에 총을 갈긴다. 학살은 골목, 시장, 광장 등 도시 곳곳에서 일어났고, 심지어 초등학교에 폭탄을 터지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기록영상에는 총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빵을 받기 위해 거리를 달리는 9세 소녀가 나온다.

 "이렇게 다니면 너무 위험하지 않아?"

 “굶어 죽거나, 총에 맞거나 어차피 똑같아요. 그럴 바에 차라리 빵을 먹기 위해 시도해 보는 게 낫잖아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9살 소녀를 보며 받았던 충격과 어른들에 대한 분노... 학교에 다시 가는 게 소원이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제라드는 말한다.

“난 사라예보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이곳에 살면서 전쟁도 겪고 정말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 도시를 한 번 둘러봐! 20년 전 지금 이 자리에 전쟁이 일어났었다고 믿기니? 난 사라예보가 정말 좋고, 이곳에서 쭉 살 거야.”

 '그래도' 고향을 사랑하는 제라드. 자신의 일을 통해 사람들이 사라예보에 대해 더 잘 알고 사랑하게 되길 바라는 그는 최근 독립하여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전쟁 당시 폭격당한 건물이 아직 도시에 남아 있지만, 불과 20년 전에 여기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도시는 아름답다. 교회와 사원과 작은 골목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도시의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사람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강변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여유로운 오후를 즐긴다.


“이게 뭐야? 설마 묘지?”

사람 구경, 가게 구경을 하며 길 따라 걷다 맞닥뜨린 도시 중앙에 있는 공동묘지. 공동묘지란 사실을 모르고 멀리서 보면 꽤 멋지지만, 가까이 가 보면 빽빽한 비석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기간이 1992년에서 1996년 사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기에 희생당한 걸까. 더 놀라운 건 묘지를 지나서 올라온 길에 신혼부부가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마치 공동묘지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혼과 묘지. 싱그러운 삶의 활력과 죽음의 그늘이 공존하는 묘한 장면. 전쟁의 광기는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이렇게도 좁혀 놓았지만, 이내 익숙해진 듯 사라예보 사람들은 그 죽음 마저도 삶에 껴안은 듯하다.

 

사라예보를 떠나던 날, 버스 승객들 중 유일하게 동양인이었던 내가 신기했던지 한 중년 여성이 날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다 내게 말을 건넨다.

“남한에서 왔어? 그러면 어디서 온 거야? 서울? 평양?”

서울과 평양을 헷갈려하던 그녀는 한국이 분단되어 있으니 나도 그 마음을 잘 알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전쟁은 정말 끔찍해. 너희도 지금 갈라져 있어서 알지? 이게 다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야. 우리 가전 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온 것처럼 보여도 계속 전쟁 중이야. 왜냐면 돈 때문에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거든.”


조용히 내뱉던 그녀의 한숨 속에 지난 세월 그녀가 견디어 온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살아남았고, 귀여운 딸까지 낳았다. 딸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 그렇게 삶을 버텨낸 사람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내 눈 앞에 있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산과 강, 그 덕분에 안개가 자주 껴서 신비스러운 도시, 사라예보.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자연과, 그리고 꿋꿋한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이 도시는 오늘도 더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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