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오랜 시간 산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정체성의 혼란이 오게 되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유학생 나, 직장인 나 (혹은 싱글여성 나)일 때는 못 느꼈던 그 혼란을 엄마가 되고부터는 아주 진하게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스위스 엄마들이 아이 키우는 법은 한국에서 내가 자란 방법과 너무나도 달라서 순간순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뭐가 그리 다른지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면, 스위스 엄마들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운다. 어린아이(심지어는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넣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 나가는 건 이제 당연해 보일 정도로 눈에 익은 일이고, 내 기준에서 너무 어리지 않나 싶은 아이(만 4~5세)가 1km 정도 거리에 있는 학교에 혼자 걸어서 등교하는 것도 여기선 흔한 일이다.
나를 포함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엄마들이 애들 차로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너무 어린애들이 찻길 건너고 산 넘고 물 건너(이건 오버스러운 내 느낌..^^;) 다니는 게 위험하지 않냐고 물으면, 여기서 자란 스위스 엄마들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우리도 다 그렇게 컸어." 한다.
일상 중 하나의 예로, 애들 옷 입히는 것도 처음에 적응을 해야 했는데, 여기는 날씨에 맞는 옷차림에 정말 철저하다. 비 오는 날이면 착! 장화에 우비, 눈 오는 날이면 짠! 스키복에 snow shoes, 완벽하게 입혀 보낸다.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등교는 걸어서 해야 하는 학교의 철칙이 있다 보니, 그 험난한(?) 길을 헤쳐 가려면 날씨에 맞는 복장이 필수이긴 하다.
기능성 복장에는 그렇게 충실한 그들이지만 멋을 위한 노력은, 혹은 딸들 데리고 어린 시절 못다 한 인형놀이의 한을 푸는 엄마는(저요^^;) 찾아보기 힘들다.
라헬이 처음 유치원에 입학해서 받아온 가정통신문의 주의사항 중에 `유치원에 너무 예쁜 옷을 입혀 보내지 않도록`이라는 당부가 있었을 정도!
반면에,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무시 못한다고, 나는 한국에서 예중, 예고를 다니면서 교복을 입었지만 그럴수록 더 뭐 하나라도 예쁜 리본핀, 예쁜 가방(또는 지갑! 그땐 그렇게 쌈지 지갑에 집착했었다!), 신발로 자신을 어필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리고 솔직히, 예쁜 리본핀, 헤어밴드 보면 내가 더 신나서 우리 딸들 느무 사주고 싶다!
그래서 우리 집 딸들은 스위스 엄마들이 보기엔 옷도 더 차려입고 학교에 가고, 가끔 재미있는 한 철 용인 최신 유행템도 장착하기도 한다. 물론, 활동에 불편하지 않는 선에서 엄마의 센스를 발휘하여 예쁘지만 과하지 않은 꾸안꾸 스타일을 추구하긴 한다.ㅎㅎ
한 번씩 우리 애들이 너무 튀는 게 아닌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닌데 얼마 전에 마침 이런 주제로 유나 친구 엄마 크리스티나와 얘기했었다. 크리스티나는 스페인 사람으로 회계사인데, 건설 회사를 경영하는 남편을 도와 일도 사회생활도 활동적으로 하는 언제나 활기찬 친구이다.
크리스티나를 주축으로 이 동네 엄마들이랑 금요일 오전마다 산책 한 시간 후 커피 마시는 모임이 있는데, 그때 그녀에게 물어봤었다.
"너는 스위스 엄마들에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아니면 네가 자란 대로 너의 방식대로 애들 키우는 편이야?"
사실, 이미 질문을 하면서도 답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하게 풍기는 사람으로 매사에 자신 있게 유쾌하게 임할 것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도 첫애 때는 여기 엄마들의 방식대로도 해보고, 때로는 눈치 아닌 눈치도 보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둘째 때는 본인이 본인 방식대로 하는 거에 대한 자신이 생겼단다.
내가 이래서 이 친구를 좋아해, 처음부터 세게 나왔으면 말 꺼내기가 어려웠을 텐데 자기도 여느 사람과 같이 시행착오도 겪으며 배워나갔던 말에 위안이 되었다.
"난 아직은 정체성을 못 찾고 시도 중인듯해. 어느 날은 동네 애들 뭐 입었나 살펴보고 입은 대로 허둥지둥 옷 꺼내서 입혀 보내고, 어떤 날은 에라 모르겠다, 내가 자란 대로 발레리나 플랫슈즈 신겨서 차로 데려다주기도 해." 했더니 하는 유쾌한 그녀의 대답:
"얘야, 너희 애들이 학교에서 제일 예쁘게 다녀. 자랑스러워할 일이야. 비싸고 싼 걸 떠나서 안목이 있다는 게 말이야. 튀고 싶지 않은 게, 묻어가는 게 너의 목표라면 너의 딸들은 이미 틀렸어. 이미 외모가 묻어가지가 않아. 누가 봐도 아시안 엄마를 가진 눈에 띄게 예쁜 혼혈들인데 이미 튀는 거 예쁘게 더 튀게 너 좋을 대로 해!"
아, 이 언니 묘하게 설득력 있다. 어쩌면 나는 우리 아이들의 엄청난 장점인 아시아 엄마를 둔(그것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신여성 엄마라고 허공에 대고 외쳐본다! 개량한복 하나 사야 하나..?) 여러 가지 문화가 융합된 강점을 나 스스로 단점이라는 틀을 끼워 넣어 자격지심을 학습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외국 생활 쉽지 않다. 외국에서 아이 키우기는 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마음이 맞는, 내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나는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못 먹어도 go! 자신 있다! 내가 나이길 두려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