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건축의 패러다임을 뒤바꾸다.
건축을 잘 몰라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 '르 코르뷔지에' (본명: 샤를 에두아르 쟌느레-그리 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프랑스에서 활동을 많이 해서 프랑스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1887년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태어났다. 라쇼드퐁 시계 제작 산업에 있어 세계적인 수도로 불리는 도시인데, 르 코르뷔지에의 아버지는 이 도시에서 시계 문자판 장인으로 일했다. 자연스럽게 르 코르뷔지에는 조형예술과 장식예술, 특히 회화와 조각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0대 시절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처음에는 조각가 또는 화가가 되길 원했고, 실제로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평생 이어졌고, 나중에는 화가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과 함께 순수주의 예술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인생은 프랑스에서 꽃 피운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을 따라가다 보면, 참 스위스 사람답다, 싶은 구석들이 있다. 그가 프랑스 태생이었다면 두드러지지 않았을 정제된 미학과 기능성에 중심을 둔 디자인. 그의 작품에는 프랑스 예술가들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묻어나기는 하지만, 축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 편에서는 그의 건축물들을 가볍게 보면서,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 따라가 본다.
1.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 : 수직으로 쌓은 마을, 현대 아파트 단지의 원형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지어진 주거 단지. 당시 주택난 해결과 전후 도시 재건의 일환으로 설계되었으며,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전 세계 집합주택 모델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대의 아파트 단지와 주거복합건물 개념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2. 빌라 사보아 (Villa Savoye) : 건축계의 모던 아트
르 코르뷔지에가 ‘근대 건축의 5원칙 (필로티, 옥상 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 자유로운 파사드)’을 완벽히 구현한 대표작이다. 1928년 사보아 부부의 주말 별장으로 설계된 이 하얀 박스형 건물은, 당시로선 혁신 그 자체였고 지금도 현대 건축의 상징으로 꼽힌다. 건축이라기보다 조각에 가깝다는 평도 있다.
3. 롱샹 성당 (Chapelle Notre-Dame-du-Haut de Ronchamp) : 가장 시적인 건축
1950년대 프랑스 롱샹의 언덕 위에 지어진 이 작은 성당은 유기적인 곡선과 두꺼운 콘크리트 벽, 흘러드는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영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코르뷔지에가 기능과 합리성의 틀을 벗어나, 빛의 흐름과 침묵, 명상, 공간의 울림에 집중한 걸작.
르 코르뷔지에는 정규 교육이 아닌 스스로 깨우친 건축학을 바탕으로 틀을 깨는 작품들을 선보였고, 새로운 건축 언어를 만들어냈다. 개인 주택, 종교 건물, 도시 설계를 아우르는 그의 건축은 혁신을 넘어서, 오늘날 도시와 건축의 근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세계 대전이 한참이던 격변의 시기에 그가 선보인 작품들은 1900년대 초중반의 건물이라기보다, 오히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그의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들이 녹아든 건축물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미래를 향한 실험과 도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행적들은 아이러니한 모습도 많이 보이는데, 그의 삶과 작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복잡한 양면성 또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르 코르뷔지에의 신체 비례 체계인 모듈러(Modulor)를 적용해, 바닥 높이부터 창 너비까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었고, 그 누구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이 건물을 설계했다. 그의 의도는 세로로 올린 하나의 공동체였으나,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고층 아파트 주거형태는 외부로부터의 고립, 이웃과 소통의 단절을 야기했다. 또한 르 코르뷔지에는 주택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불렀을 만큼 기능성과 효율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근대 건축의 교과서’라 불리는 빌라 사보아는 정작 건축주에게는 불편한 집이었다. 비가 새고, 난방이 안 되는 등 유지보수 문제로 소송까지 이어졌고, 역설적이게도 기능에 실패한 건축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사실 권력과 질서를 중시한 인물이었던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의 정치적 태도와 권위주의적 성향은 그의 실험적인 건축 철학과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1930~40년대 르 코르뷔지에는 파시스트 정권들에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 비시 정권(나치 협력 정부)과도 협업을 시도한 기록이 있다.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 자신의 도시계획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크게 비판받고는 하는데, 그의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작품 세계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지 건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이 세상과 어떻게 싸우고, 또 타협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은 현대 사회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끊임없는 물음표를 던진다. 실험적인 시도를 했던 반면 기대와 현실의 간극에 직면하고, 미래지향적인 설계 또한 위계와 질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르코르뷔지에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비인간적인 면모도, 인간적인 면모도 함께 감동을 선사한다.
담지 못한 이야기
르 코르뷔지에는 끝까지 "자신은 건축가이기보다는 예술가"라고 여겼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동차와 고속도로를 현대 도시의 핵심으로 봤다. 실제로도 자동차를 매우 좋아했고, 자신의 도시 설계를 ‘자동차를 위한 도시’라 자랑스럽게 여기고는 했다.
취리히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 뮤지엄은 목요일 저녁 5시 이후로는 무료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