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 이론의 천재, 알버트 아인슈타인
1902년의 스위스, 베른의 거리는 늘 정확한 시계처럼 움직였다. 기차는 분 단위로 도착했고, 시계탑은 변함없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특허청 3급 심사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세계에서는 빛이 기차보다 빨리 달렸고, 시간은 멈추거나 늘어날 수도 있었다.
"Herr Einstein,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동료가 서류를 내밀었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미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시계탑 종소리를 뒤로 하며, 그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우주의 법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베른의 트램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만약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시간은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의 울름(Ulm)에서 태어났다. 교실의 문제아였다고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는 수학과 과학에 있어서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냈다. 다만 당시의 딱딱한 교육 체계 속에서 그의 끊임없는 호기심은 선생들의 미움을 사기 쉬웠고, 특정 과목에 대한 무관심은 보수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반항으로 여겨졌다.
스위스는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독일의 엄격한 군국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취리히 연방 공대(ETH)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탐구할 수 있었다. 그는 1895년 16세의 나이에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에서 공부했다. 그의 업적이 칭송받는 오늘날에는 '권위적인 체제와 군사 문화에 반대했기 때문에' 독일 국적을 버렸다고 해석되지만 솔직히 16살에 뭘 알았겠는가. 오늘날의 병역 기피 정도, 군대 가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군 복무를 피했지만 그의 E=mc² 공식이 핵무기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1901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약 5년 간 무국적 상태였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에서 학업을 마친 후, 아인슈타인은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했다. 결국 베른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취리히 대학교 (University of Zurich)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그렇게 주경야독을 거듭하던 1905년,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논문들을 쏟아낸다. 후에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불리게 될 이 해에 특수 상대성이론이 세상에 등장했고,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과학계는 경악했고, 세계는 새로운 물리학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후 1909년에서야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을 그만두고 교수직을 맡았다. 1914년 베를린으로 떠났고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고 나서는 뉴저지로 떠났지만, 그의 천재성이 처음으로 빛을 발한 곳은 다름 아닌 스위스였다. 스위스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와 독립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문화는 그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그에게 스위스는 단순한 국적이 아니라,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나라’였을 것이다.
담지 못한 이야기
특허청에서 받은 연봉은 3,500 프랑으로,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1903년, ETH 취리히에서 만난 동료 물리학도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