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당장 마실 술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면? 적어도 카스나 하이트, 맥스는 절대 논외고, 하다못해 마실 수 있는 술이 달랑 한 캔 정도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테라나 클라우드까지는 고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옆에 뜬금없이 와인이나 위스키가 토닉워터와 함께 있다면?
국산 맥주 따위 마실까 보냐! 차라리 와인이나 위스키를 섞어 마시고 본다.
물론 이건 소위 세간의 소문으로부터 '뜨물', '물탄 맛'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맛 없는 국산맥주'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썰은 이 세상에 넘치고 흘렀다. 국내의 많은 맥주 애호가들이 국산 맥주의 몰락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으니.
이런 시점에서 오히려 얼핏 듣기에 매우 기괴하고 역설적인 논제를 던지려 한다.
우리가 흔히 '맛' 없는 맥주의 대표명사로 이야기하곤 하는 카스나 하이트, 맥스가 참 맛이 있다는 사람이 여기 있다. 너무나 충격적이게도, 이 사람은 천편일률적인 수입 맥주의 맛보다 '국맥'이 훨씬 낫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람은 A펍 한 곳만을 이용하는 단골이다 그 펍에서 판매하는 주류라고는 오직 국내산 생맥주만을 판매한다.
기막힌 상황이다. 솔직히, 국산 맥주에 관해 엄혹하게 날을 세우는 나라가 우리나라말고 또 있을까도 싶다 오죽하면 '가상 적국'인 북한의 대표 맥주, 대동강 맥주보다도 자국의 맥주가 맛이 없다고 말할까!
여기에 맥주의 성분표를 보면 이러한 궁금증은 더욱 극에 달한다. 실상 외산 맥주와 거의 차이가 없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료 자체의 차이는 없다고 봐도 좋은 걸까? 아닌 게 아니라 국산 맥주 회사의 양조장 투어를 가서 마신 맥주는 마트에서 사서 마신 캔맥의 그 맛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난다고 증언한 이들도 종종 있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진짜로 국산 맥주 회사들이 '너무하게도' 맥주 원액에 물을 타서 판매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저런 의문에 더욱 깊이 빠져들 즈음, 뜻밖에도 근래 로컬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국내 수제 크래프트 맥주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농업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산업계에서 이 막 태동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수제 맥주 시장에 너도나도 조언을 던지는 것도 무수히 찾아 봤다.
그 모든 조사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분명했다. 생각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맥주 시장은 하드코어 덕후도 심히 부족했으며 팔할이 라이트 음용 계층이었다. 그마저도 맛보다는 당장 나갈 지출을 더 크게 생각하고 맥주를 맥주 그 자체로 즐기기보다 음식상에 오르는 조연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도.
결국 오늘날 국산 맥주의 실패는 시장에서 비롯된 문제다. 소비자는 스스로 맥주 맛에 대한 주관도 취향도 가다듬을 수 없었고, 제공된 기회 역시 빈약한 건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러니 펍의 비어 마스터 또한 생맥주 기계를 잘 다룰 수 있을 리 없다. 기계의 노즐에 미세한 침전물 찌꺼기만 쌓이더라도 맥주의 맛은 놀라우리만큼 떨어진다. 그러나 이를 염두에 두고 기계 보수를 하거나 기계를 다루는 비어 마스터가 과연 이 땅에 얼마나 될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근 로컬 사람들과 로컬 플레이스를 매개로 점점 더 날개를 펼치려 하는 수제 크래프트 맥주의 성장세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이 미약한 시작이 언젠가는 진정 우리 국산 맥주도 '맛' 있다는 말로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